피의 독재자 vs 개발영웅…‘32년 철권통치’ 두 얼굴

  • 동아일보
  • 입력 2008년 1월 28일 02시 52분


1921∼2008 수하르토 전 印尼대통령

6번 연임 - 30만명 학살 “최악 부패 정치인”

연평균 7% 경제성장 이뤄 생활수준 개선도



27일 타계한 수하르토(사진) 전 인도네시아 대통령은 ‘개발의 아버지’와 ‘철권 독재자’라는 엇갈린 평가를 받아 왔다.

1966년 수카르노 전 대통령에게서 권력을 이양 받은 수하르토 전 대통령은 1998년 축출될 때까지 30여 년간 장기 집권했다. 그는 ‘개발과 안정’이라는 기치 아래 인구 2억3000만 명의 대국(大國) 인도네시아의 경제성장을 이끌며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재임 시절 각종 비리에 연루됐고 철권 독재정치로 반발을 샀다. 결국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로 민심을 잃은 뒤 이듬해 대규모 반정부 시위로 물러났다.

수하르토 전 대통령이 축출된 뒤에도 재임 시절 그가 임명한 각료들은 정부에 그대로 남았다. 그는 이를 이용해 정계에 간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11일 그가 의식불명 상태에 빠졌을 때 유숩 칼라 부통령이 급히 병실을 찾은 것도 그가 정치적으로 건재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27일 수하르토 전 대통령을 애도하기 위해 일주일간 전국에 조기를 게양한다고 발표했다.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 인도네시아 대통령과 글로리아 아로요 필리핀 대통령, 케빈 러드 호주 총리 등 주변국 정상들도 애도를 표했다.

수하르토 전 대통령은 1921년 자바 섬의 욕야카르타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19세 때 네덜란드 식민 치하의 동인도회사 군에 입대했고 일본 군정 아래에서 장교를 지냈다. 1945년 인도네시아가 네덜란드로부터 독립한 뒤에는 욕야카르타의 연대장 등을 지낸 뒤 1960년 육군참모차장에 올랐다.

수하르토 전 대통령은 1965년 9월 수카르노 당시 대통령의 친위대가 일으킨 쿠데타를 진압하면서 권력의 핵심으로 부상했다. 그는 반란군의 배후로 인도네시아공산당(PKI)을 지목하고 당원 50만 명 이상을 처형했다.

제2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그는 6번 연임하면서 네덜란드의 식민통치와 일본의 수탈로 쇠락한 경제를 되살려 ‘개발의 아버지’로 불렸다. 수카르노 전 대통령이 ‘건국의 아버지’로 불린 것에 빗댄 표현이다.

그는 공산주의와 민족주의를 중시한 전임자와 달리 ‘반공(反共)’과 ‘친(親)서방’ 정책을 펼치며 미국과 유럽 선진국으로부터 막대한 투자를 이끌어 냈다. 이 자금을 발판으로 제조업을 발전시키고 석유와 가스 수출을 늘려 연평균 7%라는 경이로운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다.

그러나 경제성장의 이면에는 피로 얼룩진 철권 독재가 자리 잡았다. 수하르토 전 대통령은 재야 세력과 언론 등 반대파를 잔혹하게 탄압했다. 1975년에는 자원을 노리고 동티모르를 침공해 30여만 명의 희생자를 냈다고 AFP통신이 전했다.

그는 자식과 친인척을 정재계 요직에 등용해 ‘족벌체제’를 구축하기도 했다.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를 겪으면서도 자신의 권력 기반을 유지하기 위해 국제통화기금(IMF)의 경제개혁 요구를 거부했다. 이에 따라 권력형 비리와 부패가 끊이지 않았다.

수하르토 전 대통령은 유엔과 세계은행이 지난해 발표한 ‘세계에서 가장 파렴치한 횡령범’ 명단의 맨 위에 이름을 올리는 불명예를 안기도 했다. 부패감시기구인 국제투명성기구도 2004년 그를 ‘20세기 가장 부패한 정치인’으로 선정했다. 수하르토 전 대통령이 국고에서 빼돌린 돈은 150억∼350억 달러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결국 2000년엔 재직 중 부정축재 혐의로 가택연금을 당했다. 인도네시아 검찰은 여러 차례 그를 부패 혐의로 형사처벌하려고 했으나 병세 악화를 이유로 2006년 5월 불기소 처분을 내렸다. 그러나 검찰은 지난해 7월 그가 대통령 재임 중 횡령한 자선단체 기금 등 14억 달러의 반환을 위한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그의 사망이 임박하면서 인도네시아 일각에선 ‘동정론’이 대두됐고 검찰도 12일 민사소송 건에 대해 수하르토 전 대통령의 가족과 법정 밖 화해에 합의했다. 그러나 그의 재임 시절 정치범 등 희생자 100여 명은 “죽기 전에 그를 법정에 세우라”며 시위를 벌였다.

생전에 수하르토 전 대통령은 ‘개발독재 지도자’라는 공통점 때문에 박정희 전 대통령과 종종 비교 대상에 오르기도 했다.

남원상 기자 surrea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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