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로 보내는 희망편지]한우석 군

  • Array
  • 입력 2009년 4월 17일 02시 56분


코멘트
“힘들때 손 잡아주던 태권V처럼
용기 주는 만화 그리고 싶어요”
애니메이션 작가
꿈 키우는 한우석 군


안녕하세요. 저는 강릉 경포고 1학년 한우석(사진)입니다.
평소 만화를 통해서만 보던 김청기 작가님을 편지로나마 만나게 되어 가슴이 설렙니다. 지금의 이 설렘은 만화작가가 되고 싶은 제 꿈이 머지않아 이루어질 수도 있겠다는 부푼 희망 때문인 것 같습니다.
가끔은 힘든 적도 있었는데 그때마다 저는 그림으로 저를 표현하면서 지냈습니다. 도화지는 힘들 때마다 제가 떠날 수 있는 꿈나라 같은 곳입니다. 그래서 그림을 그릴 때 마음이 가장 편하고 즐거워요. 제가 그림에 소질이 있다는 가족의 권유로 미술학원도 다녔습니다.
그러면서 애니메이션 작가라는 꿈을 갖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잘할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김 작가님이 떠올랐습니다. 늘 정의를 위해 나쁜 사람들을 혼내주던 ‘로봇 태권 V’의 멋진 모습…. 제가 어렵고 힘들 때 도움을 받은 것처럼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들이 제 그림을 보고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좋은 작가가 되고 싶습니다.
선생님을 만나면 제 그림을 한번 보여드리고 지도를 받아봤으면 합니다. 제가 특히 인물 그림에 약한데 선생님만의 비법도 여쭤보고 싶고요. 바쁘시겠지만 도와주시면 저도 더욱 열심히 하겠습니다.

‘로봇 태권V’ 김청기 감독
“산골에서 키운 상상력은 너의 힘”

‘로봇 태권 V’ 김청기 감독(68·사진)에게도 하얀 종이는 탈출구였다. 가난과 작별할 수 있는 유일한 안식처였다.
김 감독의 아버지는 6·25전쟁 통에 인민군에 의해 납북됐다. 9남매는 홀어머니 손에 맡겨졌다. 세 칸짜리 판잣집에 살면서 수수죽으로 끼니를 때우고 고사리손으로 땔감을 구하러 다녔다. 유년 시절 김 감독은 다락방에 누워 미군부대에서 나온 이면지의 하얀 세계에 빠져들곤 했다. 그림의 떡이던 탱크 장난감, 학교에서 배운 은하수, 꿈에서 본 아버지 등 만질 수 없는 것들을 백지에 그렸고, 그래서 만났다.
12일 서울 남산 애니메이션센터에서 한우석 군(16)과 만난 김 감독은 “너도 흰 여백만 보면 그렇게 그리고 싶니? 우리는 같은 종자야”라며 껄껄 웃었다.
12일 서울 남산 애니메이션센터의 ‘로봇 태권 V’ 모형 앞에서 한우석 군(오른쪽)이 김청기 감독과 함께 ‘V’자 표시를 해보이고 있다. 이훈구  기자
12일 서울 남산 애니메이션센터의 ‘로봇 태권 V’ 모형 앞에서 한우석 군(오른쪽)이 김청기 감독과 함께 ‘V’자 표시를 해보이고 있다. 이훈구 기자

“실패 두려워했다면 태권V 없었다”
“결핍은 자산이란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도록 해주니까. 알고 보면 우석이는 가진 게 많아. 만화는 돈이 필요 없어. 종이에 연필 한 자루면 돼. 열악한 환경에서 독하게 하는 친구들이 큰 꿈을 이룰 수 있는 분야지.”
검은 뿔테안경에 티셔츠를 입은 김청기 감독은 아이처럼 웃으며 추억을 되살렸다.
“학교 수업시간에 교과서 여백에 대포가 날아가는 장면을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연속 장면으로 그리고, 후루룩 넘기면 대포가 정말로 날아가 ‘쾅’ 하고 터졌어. 혼자 신나서 ‘캬∼’ 하다가 고개를 들면 선생님이 회초리를 든 채 눈을 부릅뜨고 계셨지.”
우석 군을 실습실로 안내한 김 감독은 “자신 있는 거 한번 그려보라”며 종이와 색연필을 꺼냈다. 우석 군은 일본 애니메이션 캐릭터인 ‘에반게리온’을 얼굴부터 그려 내려갔다. 원본 없이도 얼굴 표정과 팔 근육 등을 세밀하게 묘사했다.
“우석이가 에반게리온에 푹 빠졌구나. 지금은 옆에서 본 모습인데 위나 정면에서 보면 어떤 모습일까. 우석이 또래 친구들이 흔히 범하는 오류가 그림 하나에 꽂히면 그것만 파는 거야. 애니메이션은 카메라로 찍는 것처럼 입체적이어야 돼. 부분적 디테일보다 전체의 골격을 잡는 게 중요해.”
우석 군이 나무보다 숲을, 오늘보다는 내일을 보는 게 김 감독의 바람이었다. 그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어려운 고비를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지독했던 가난 덕이기 때문이다.
만화영화에 대한 대중의 관심과 산업적 인프라가 전무했던 1970년대, 김 감독은 첫 국산 애니메이션인 ‘로봇 태권V’를 만들었다. 실패가 뻔한 작업이라 주변에 손을 벌릴 수도 없었다. 15년간 만화를 그려 모은 돈을 전부 쏟아 부었지만 맨땅에서 시작했기에 잃을 게 없었다.
김 감독은 실패의 의미를 강조했다. 흥행을 못하면 반드시 극장을 찾아 어린이 관객과 함께 만화를 보며 실패요인을 찾았다.
“아이들은 반응이 바로바로 와. 조금만 지루해지면 시끌시끌해지고, 재미가 있으면 조용하지. 내가 웃음을 주려고 공을 들인 장면에서 극장이 어수선해지면 가슴이 찢어지지만 그만한 공부가 없단다. 우석아, 좌절을 두려워하면 큰 성공을 못해.”
‘로봇 태권V’가 어린이들의 우상이 되면서 보잘것없었던 판잣집 소년도 거장의 반열에 올랐다. 꿈을 이루기까지 김 감독을 지탱해준 또 하나는 “나에게 없는 것보다 내가 가진 것을 먼저 보자”는 긍정적인 사고방식이었다.
“한창 감수성을 키울 나이에 강원도 산골에 사는 건 행운이야. 자연을 책으로만 보는 서울 아이들은 우석이의 상상력을 당해낼 수 없어. 예술고가 아닌 인문계고에서 다양한 과목을 배우는 것도 강점이란다. 디즈니만화를 주문 생산하다 보니 손재주만 세계적인 게 우리 애니메이션의 문제거든. ‘해리 포터’처럼 좋은 스토리를 만들려면 널리 열심히 공부해야 돼.”
신광영 기자 neo@donga.com

‘희망편지’ 주인공 후원 문의 1588-1940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