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영실씨 “윤치호 영어일기 속엔 美國을 향한 선망 가득"

  • 입력 2003년 11월 20일 18시 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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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 지금의 야만적 상태에 머무느니 차라리 문명국의 식민지가 되는 게 낫겠다.’ (1890년 5월 18일)

개화파 지식인으로 서재필 이상재 등과 독립협회를 조직했던 윤치호(尹致昊·1865∼1945·사진). 그가 영어로 쓴 일기에 남긴 미국에 대한 선망(羨望)이다.

‘수유연구실+연구 공간 너머’의 윤영실 연구원(서울대 국문과 박사과정 수료)은 논문 ‘미국과 식민지 근대주체 형성의 한 경로:윤치호 일기를 중심으로’에서 한 지식인의 사적(私的) 기록을 통해 미국에 대한 종속적 시각이 내면화하는 과정을 분석했다. 논문은 학술단체협의회 주최로 21일 서울 구로구 항동 성공회대 피츠버그홀에서 열리는 ‘우리 학문 속의 미국: 미국적 학문 패러다임 이식에 관한 비판적 성찰’ 심포지엄에서 발표된다.

윤치호가 쓴 영어일기의 원본 일부분. 1919년 3월 1일자 일기로, 3·1운동의 상황과 그에 대한 느낌을 적었다. -사진제공 역사비평사

몰락한 양반 가문 출신인 윤치호가 과거도 치르지 않고 1883년 초대 주한 미국공사의 통역관 지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영어 실력 때문이었다. 1881년 신사유람단을 따라 일본으로 건너가 네덜란드 영사관 서기관으로부터 4개월간 영어를 배운 것.

1888년 미국 유학길에 오른 윤치호는 1889년부터 영어로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윤치호는 1895년 귀국해 독립협회 회장(1898), 대한자강회 회장(1906) 등을 맡아 독립운동과 애국 계몽운동을 주도하면서도 50년이 넘는 기간 중 연간 100여쪽의 영어일기를 썼다.

윤치호가 영어로 일기를 쓴 이유는 △‘자유’ ‘권리’ ‘의회’ 등 서구 시민사회의 산물을 번역할 만한 마땅한 국문이 존재하지 않았고 △국문에는 언문일치나 고백체가 없어 ‘고백적 글쓰기’가 어려웠기 때문.

미국 유학시절 영어일기에는 ‘내 나라의 치욕과 수치스러움에 대한 의식’(1891년 2월 1일) 등 서구인들 앞에 주눅 든 윤치호의 모습이 자주 드러난다. 그에게 서구 문명의 수용은 국가의 ‘독립’보다 우선하는 가치였다. 윤 연구원은 “문명만이 절대 선이고 문명을 위해서라면 강대국에의 종속도 불가피하다는 신념에 따라 미국을 선망하고 조선에 열등감을 가졌던 윤치호가 결국 당시 동양의 문명국 일본에서 타협을 본다”고 분석했다.

‘만약 내가 마음대로 내 고국을 선택할 수 있다면, 나는 일본을 선택할 것이다. 오, 축복받은 일본이여! 동방의 낙원이여!’(1893년 11월 1일)

일제 말 변절해 귀족원 의원을 지낸 윤치호는 광복 후 친일파로 규탄받자 자결하고 말았다. ‘주체 없는 문명화’의 파멸이었다.

이진영기자 eco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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