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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오피니언

[고미석 칼럼]왜 지금 처칠인가

입력 2017-11-29 03:00업데이트 2017-11-29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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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두 편의 전기영화 통해 새롭게 주목받는 처칠의 궤적
公的私的 흠결에도 불구하고 존경받는 처칠 리더십의 핵심은
꽃길 대신 가시밭길 선택한 것
국민 설득해 위기 헤쳐 나가는 국가지도자의 용기 일깨우다
고미석 논설위원
영화 ‘다키스트 아워(Darkest Hour·어둠의 시간)’가 지난주 북미에서 개봉된 뒤 주연배우 게리 올드먼은 내년 오스카상 후보감이란 호평을 받았다. 영국의 전설적 총리 윈스턴 처칠을 다룬 이 영화는 제목도 그의 명연설에서 따왔다. 믿었던 프랑스마저 나치에 무너지고 유럽에서 외톨이가 된 조국에 닥친 누란의 위기를 빗댄 표현이다. 올해 6월 또 다른 전기 영화 ‘처칠’이 공개되었다. ‘다키스트 아워’는 1940년 됭케르크 철수작전, ‘처칠’은 19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 등 정치 인생의 결정적 순간을 다뤘다.

왜 지금 다시 처칠인가. 21세기에도 주목받는 처칠의 궤적이 궁금해 살펴보니 볼수록 흥미진진하다. 결점도 미덕도 범상치 않다. ‘품행이 상당히 나쁘고 믿을 수 없는 학생’은 삼수 끝에 사관학교 입학. 정계 진출 이후 보수당-자유당-보수당으로 좌우 오락가락. 제1차 세계대전의 갈리폴리 전투 등 처참한 패배도 상당수. 허영심에 씀씀이는 헤펐고 거의 술을 달고 살았다. 독선적 성격에 고집불통.


그런 처칠에 대해 영국인의 애정은 각별하다. 11월 30일은 처칠이 탄생한 날, 1874년생이니 이승만보다 한 살 위, 김구보다 두 살 많다. 한국 사회에서 요구하는 무결점 영웅과는 거리가 멀지 몰라도, 영국에서는 나라 구한 국민적 지도자로 아낌없는 경의를 보낸다. 그 일치된 평가는 좌우불문 당파초월. 처칠은 2차대전 종전과 함께 전쟁의 승리와 선거의 패배를 맛보지만 77세 생일을 한 달 앞두고 총리 자리를 되찾는다. 타계했을 때는 영국의 첫 민간인 국장(國葬)이 치러졌다. 장례식 영상을 보면 템스강을 지날 때 거대한 기중기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이는 장면이 나온다. 그에 대한 존경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2002년 BBC의 100만 명 설문조사에서 셰익스피어, 다윈, 엘리자베스 1세 등 위대한 문호 과학자 군주를 제치고 ‘가장 위대한 영국인’에 전직 총리가 뽑혔다. 우리에게 그런 사람이 없는 것은 왜일까.

공적 사적으로 무수한 흠결이 끼어들 틈조차 없는 처칠의 빛나는 공적은 절망적 상황에 빠진 영국에 승전을 안겨준 탁월한 리더십. 광기의 시대에 맞선 지도자의 의지와 통찰력은 영국을 넘어 인류 역사의 물길까지 바꿨다. 대중에게 전쟁광이란 손가락질을 받으면서도 처칠은 편한 길 대신 힘든 선택을 꿋꿋하게 밀어붙였다. 당장의 인기 없는 결정이 훗날 나라에 큰 이득이 될 것이란 확신에서다. 처칠 전기를 쓴 보리스 존슨(현 외교장관)이 가장 큰 덕목으로 ‘위험을 기꺼이 무릅쓰는 용기’를 꼽은 이유이기도 하다.

히틀러의 야욕을 남보다 앞서 알아챈 탓에 처칠은 되레 ‘일어나지 않을 일을 걱정하는 사람’이란 비웃음만 샀다. 1939년 전임자 체임벌린 총리가 독일과 ‘뮌헨협정’을 체결한 뒤 ‘평화를 가지고 돌아왔다’고 떠벌릴 때 처칠은 분개하며 말했다. ‘당신에게 전쟁과 불명예 중 선택이 주어졌다. 당신은 불명예를 선택했으나 결국은 전쟁을 얻게 될 것’이라고. 이듬해 총리가 된 그는 ‘내가 바칠 것은 피와 땀과 눈물밖에 없다’며 전쟁을 각오하지 않으면 평화도 지킬 수 없다고 국민을 설득했다.

역사는 누가 옳았는지를 증명한다. 1941년 미국의 지원을 얻어내기 위해 방미했을 때는 루스벨트 대통령과 자신을 ‘보스’와 ‘부관’으로 칭했다. 옛 식민지의 대통령 앞에서 한껏 자세를 낮춘 처칠. 과연 자존심이 없어서였을까.

‘명언 제조기’로 불리는 그가 남긴 말 가운데 되새겨볼 것이 많다. ‘두려움은 반응이지만 용기는 결단’ ‘만약 우리가 현재와 과거를 서로 경쟁시킨다면 반드시 미래를 놓치게 될 것’ 등. 한반도를 둘러싼 시절은 하수상한데 정치인들은 불편한 진실을 외면하고 세력다툼에 급급하다. 그들의 관심과 존재 이유는 오직 ‘울타리 안’뿐이라는 듯이.

처칠이 그랬듯이 무릇 지도자의 역량은 국민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힘에서 판가름 날 터다. 달콤한 약속을 기대한 국민에게 가시밭길을 함께 헤쳐가면 꽃길도 나온다는 믿음을 심어준 처칠. 다가오는 위협 앞에 결코 등을 보이지 않는 지도자의 용기를 일깨워 준다. 꽃길 걷기를 희망하는 많은 사람들. 과연 지금 이곳은 꽃길인가.

원한다고 다 얻어지는 것이라면 누가 꽃길로 못 가겠는가. ‘언제나 가장 어려운 길을 선택하라. 그곳에서는 적수가 없다.’ 처칠한테 큰 빚을 졌던 프랑스 드골이 뼈저린 경험에서 터득한 교훈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어디로 가고 있을까.
 
고미석 논설위원 mskoh1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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