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펜 회사가 100년 동안 써내려 간 편지 [브랜더쿠]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10월 6일 10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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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더쿠’는 한 가지 분야에 몰입해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 가는 ‘덕후’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자신이 가장 깊게 빠진 영역에서 나만의 브랜드를 만들어 내고, 커뮤니티를 형성해 자신과 비슷한 덕후들을 모으고, 돈 이상의 가치를 찾아 헤매는 이들의 이야기에 많은 관심 부탁합니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대학교 진학할 때까지 나의 장래희망은 ‘카피라이터’였다. 막연히 언론홍보영상학부에 진학하면 실무와 연관된 학부이니 그 길을 쉽게 찾을 수 있을 거 같았다. 하지만 나는 대학생활을 하며 카피라이팅의 세계와는 점차 멀어졌고 결국 다른 진로로 방향을 틀었다.

2009년, 일본에서 교환학생으로 지내던 어느날, TV에서 추억의 워크맨이 등장했다. 곧이어 “10대 때 흥얼거린 노래를 사람은 평생 흥얼거린다”라는 카피를 듣자 마자 나의 시간이 10대로 흘러갔다. 나는 워크맨 세대라기 보다는 mp3 플레이어 세대지만, 이 광고는 아마도 각자만의 오래된 노래를 찾는 촉매제 역할을 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 때부터 지금까지 나는 일본 카피라이팅에 빠져들었다. 카피 한 줄이 불러오는 세계가 어마어마한데다 각인 효과까지 남아 광고의 대상을 긍정적으로 기억하게 되는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카피라이터가 되지는 못했지만 지금도 나는 문장을 수집한다는 마음으로 일본 광고를 본다. 일본어를 알기에 이러한 멋진 문장을 알 수 있게 되어 감사하다는 마음과 함께.

나는 스무살 이래 일본 여행을 꾸준히 다녔다. 대도시, 소도시 할 것 없이 1년에 서너 번 이상 현해탄을 건너간다. 지하철, 전차, 길거리와 편의점에서까지 접하는 수많은 광고물을 만나는 건 광고 문장을 수집하는 여행자에게 또 하나의 큰 기쁨이다.

좋은 카피는 정말이지, 많다. 하지만 필자가 중점적으로 소개하고 싶은 광고는 인쇄물 광고다. 딱 한 장, 간결한 문장으로 이뤄진 광고를 소개할 것이다. TV광고는 시놉시스와 장면들을 파악해서 전달하기에 깊고 다양하게 생각할 여지가 많지 않다고 느낀다. 하지만 인쇄광고는 좀 더 시적(詩的)이다. 또 한국에서는 인쇄 광고가 사양화했기에, 독자들이 일본의 인쇄 광고에 대해 더 새롭게 느낄 수도 있을 것 같다.

첫번째로 감상을 나눌 인쇄 광고는 100년 이상 필기구 사업을 지속해온 ‘파일럿(Pilot)’사의 작품이다.

쓰는 사람은 천천히 살아간다.
쓰는 사람은 천천히 살아간다.


(쓰는 사람은) 하루정도 답장이 없어도, 불안하지 않습니다.
시간을 들여 써내려 간 단어를 혼자만의 시간에 천천히 읽어봅니다. 평소보다 좀 더 긴 시간을 들여 자신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쓰는 사람은 알고 있습니다.
때때로는, 펜을 들어보지 않겠습니까? 나도 모르게 서둘게 되는, 자신의 스위치를 꺼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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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쓰는 사람은 천천히 살아간다>는 카피의 광고를 살펴보자. 쓰는 사람의 시간은 천천히 흐르며, 그 시간은 나를 발견하는 시간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휴대폰 문자, 메신저, 사내외 이메일을 통해 수많은 글을 쓰지만 진정한 글의 가치란, 손으로 시간을 들여 써내려 가는 것임을, 파일럿은 말하고 있다. 여기에 부드러운 필기감을 자랑하는 유려한 글씨체, 잉크의 농담으로 멋지게 쓰여진 카피가 아날로그 시계와 매우 잘 어우러져 보인다.

울까, 먹을까, 쓸까
울까, 먹을까, 쓸까

소비자에게 마치 편지를 띄운 것 같았던 2016년 광고를 지나, 2019년에는 메시지의 강도가 세졌다. 2019년 파일럿 광고의 카피는 매우 짧고 굵다. 이 카피를 보자마자 영화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라는 제목이 떠올랐다. 세 가지의 동사가 어우러져 리드미컬한 운율을 빚어냈던 그 느낌. 우리 삶에 꼭 필요한 동사가 사실은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 제목이었다. 파일럿의 광고 카피도 꼭 그런 울림을 주었다.

어쩐지 화가 나 보이는 여인의 옆얼굴 위로 무심하도록 큰 글자로 쓰여진 동사 세 개. 화가 나서 분하면 울 수도 있고,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먹을 수도 있다. 하지만 마음을 다스리고, 내 상황을 객관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는 방법은 세 가지 중 어떤 것일까?

회사에서 일이 폭풍처럼 밀려들 때 나는 잠시 자판기에서 손을 내려놓고 수첩을 꺼낸다. 그리고 오늘 할 일에 대해 적어 내려가고 폭발하려는 마음을 다잡아 우선 순위를 정한다. 신기하게도 펜을 들면 화가 난 마음이 누그러진다. 부정적인 감정을 표출해봐야 달라지는 건 없으며 급여 노동자로서 이 상황을 가능한 신속하게 처리해야 한다는 객관적인 의무만 남는다. 아무렇게나 적는 수첩에는, 가끔 일을 하다 만나게 되는 멋진 글귀를 한 두 문장을 적으면서 밸런싱을 맞출 수 있어 좋다. 이 광고는 사무실 내 책상에 붙어 있다.

써보았다, 내 목소리가 들렸다.
써보았다, 내 목소리가 들렸다.


2021년의 광고는 좀 더 상냥해졌다. 어찌보면 난폭해보였던 큰 글자를 줄여, 굵기도 속삭이듯이 얇아졌다.

감정이 종이에 옮겨지는 일기조차 내가 직접 손으로 옮겼을 때, 언어로 표현된 문장이나 어투는 조금 생소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 때 나의 마음이 구체적으로 어떠했는지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심리학자들은 쓰는 행위 자체가 나를 치유하는 것이라고 한다. 스트레스를 덜어내는데 도움을 주고, 복잡한 생각을 다이어트 하는 데에도 손으로 쓰는 것은 효용이 있다는 걸, 누구나 경험해 봤을 것이다.

무언가를 쓴다는 것은 사고나 창조, 기록 등 인간 특유의 문화와 깊이 연관돼 있다.

그러기에 파일럿은 각각의 시대에 걸 맞는 필기구를 통해 소비자가 ‘사고하는 것’ 나아가 ‘창조하는 것’을 지원하겠다고 홈페이지에서 밝힌다. 세계적으로 진행되는 디지털화 영향으로 필기구를 둘러싼 환경은 크게 변했지만 파일럿이란 기업은 “사람과 창조력을 연결한다”는 기업 목표를 재설정했다. 오늘 잠시 짬을 내어 펜을 든 손이, 나를 창조의 문으로 인도하기를 기대해본다.

이해원 작가 inky.june@gmail.com
정리=장재웅 기자 jwoong04@donga.com

#브랜더쿠#인쇄광고#카피라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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