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김정훈]네가 죽어야 내가 산다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2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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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훈 사회부장
김정훈 사회부장
법무부가 ‘사법시험 폐지를 4년 유예하자’고 발표한 이후 사법시험 존치를 주장하는 쪽과 이에 반대하는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간의 대치가 그치지 않고 있다. 로스쿨 학생들은 집단 자퇴서를 낸 데 이어, 13일에는 검사 임용의 첫 단추가 되는 ‘검찰실무’ 과목 기말고사를 대부분 거부했다. 학생들은 내년 1월 4∼8일로 예정된 변호사시험도 거부하자는 ‘응시 취소 위임장’ 모으기에 나섰고, 로스쿨 교수들은 변호사시험 문제 출제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사시 존치 고시생 모임 등은 로스쿨 측의 집단행동에 불참하는 학생들에게 불이익을 가하겠다고 한 서울대와 한양대 로스쿨 학생회 임원들을 업무방해와 강요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고, 로스쿨 출신 변호사 모임인 한국법조인협회는 100여 명의 대규모 변호인단을 꾸려 방어에 나섰다는 얘기도 들려온다. 노동조합으로 치면 ‘총파업’에 나선 로스쿨 측과 형사고발로 맞선 사시 존치 측 간의 충돌은 말 그대로 막가자는 분위기다.

사시 폐지 유예안을 내놓은 법무부가 먼저 벌집을 쑤셔놓은 것은 맞지만, 법을 배우고 법을 다루는 직업을 갖겠다는 이들이 이렇게까지 이전투구를 벌일 줄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사시 존치의 찬반 여부를 떠나 지금 벌어지는 사태에 경악했다는 국민이 많다.

정부와 여당의 속내는 사법시험 대신 ‘변호사 예비시험’ 같은 것을 두어 법조인 배출경로를 투 트랙으로 유지하자는 데 있어 보인다. 꼭 로스쿨을 나오지 않더라도 변호사시험을 볼 수 있는 자격을 주는 예비단계의 시험을 신설해 예비시험 합격자와 로스쿨 졸업시험 합격자들이 함께 변호사시험을 치르게 하자는 방안이다.

명분은 이렇다. 로스쿨로 법조인력 배출 통로를 일원화해 놓으면 비싼 수업료와 3년의 시간을 투자할 여력이 없는 사람은 법조인이 될 꿈도 꾸지 말라는 게 된다는 것이다. 이른바 ‘개천의 용’에게도 길을 터줘야 한다는 주장이다. 게다가 로스쿨 입학과 졸업, 이후 취업을 둘러싸고 터져 나온 일부 유력인사 자제들의 이런저런 추문이 국민 정서를 자극했다.

그러나 로스쿨 측은 사실과 다르다고 반박한다. 2002∼2014년 사법시험 합격자(1만452명)의 출신 대학은 평균 43개 대학이었으나, 2009∼2013년 로스쿨 입학자(1만382명)의 출신 대학을 보면 평균 95개 대학으로 크게 늘었다는 것이다. 로스쿨 제도 도입 이후 법조인 진입장벽이 크게 낮아졌다는 얘기다. 로스쿨 쪽에선 또 다른 법조인력 배출 통로를 남겨놓았다가는 언젠가는 로스쿨 제도 자체를 근본적으로 흔드는 싹이 될 수 있다고 우려한다.

꼭 로스쿨 제도 도입의 성과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로스쿨 도입과 함께 법조인 배출 인원이 크게 늘면서 소비자 입장에서는 이점이 많은 게 사실이다. 과거 같으면 변호사 채용을 엄두도 내지 못했을 공공기관이나 기업들이 요즘엔 로스쿨 출신 고급인력을 비교적 저비용에 쓸 수 있는 상황이 됐다. 법조인 배출 인원이 연간 1500명 선으로 늘면서 진입장벽이 낮아지고, 소비자 입장에서는 손쉽게 이용할 수 있는 효과가 나타난 것이다.

여하튼 지금 예비 법조인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의 문제는 법조인의 직업윤리인 사회적 책무나 소명의식은 헌신짝처럼 내던진 채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네가 죽어야 내가 살 수 있다’는 논리도 아닌 논리만이 횡행하고 있다. 이런 정신적 붕괴 현상은 법조계의 공멸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심각하다. 어떤 직업군이든 그 몰락은 시장의 붕괴에 앞서 공공의 이익을 저버린 직업윤리의 상실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김정훈 사회부장 jnghn@donga.com
#사법시험 폐지#로스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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