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공감Harmony]“내 아들과 나, 야구로 맺어진 인생파트너”… 野神 김성근 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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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9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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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공감을 말하다… 김성근 고양 원더스 감독, 김정준 SBS-ESPN 해설위원

김성근 고양 원더스 감독(오른쪽)과 김정준 SBS-ESPN 해설위원. 이들이 부자(父子)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의외로 많지 않다. 김성근은 설명이 필요없는 야구계의 큰 별. 김정준은 덜 알려지긴 했어도 야구인과 마니아들로부터 전력분석에 관한 한 최고라는 찬사를 듣는다. 그 동안 아들은 아버지의 그늘을 벗어나기 힘들었다. 김성근의 아들이란 게 짐이었다. 11일 고양야구장에서 이들 부자의 갈등과 고민을 들어봤다. 고양=서영수 사진전문기자 kuki@donga.com
김성근 고양 원더스 감독(오른쪽)과 김정준 SBS-ESPN 해설위원. 이들이 부자(父子)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의외로 많지 않다. 김성근은 설명이 필요없는 야구계의 큰 별. 김정준은 덜 알려지긴 했어도 야구인과 마니아들로부터 전력분석에 관한 한 최고라는 찬사를 듣는다. 그 동안 아들은 아버지의 그늘을 벗어나기 힘들었다. 김성근의 아들이란 게 짐이었다. 11일 고양야구장에서 이들 부자의 갈등과 고민을 들어봤다. 고양=서영수 사진전문기자 kuki@donga.com
○ 아버지의 그림자. 착한 아들 콤플렉스


어린 시절 무뚝뚝하고 엄했던 아버지. 대화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한국말이 서툰 탓도 있었지만 평소 얼굴 보기가 힘들었다. 네 살 때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처음 찾은 야구장. 그땐 세상에 야구밖에 없는 줄 알았다. 모태신앙이란 말에 비유하면 ‘부태야구’였다. 하지만 야구의 바다에 던져놓곤 끝이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시작된 선수 생활. 아버지의 피드백은 없었다. 아버지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제자였던 초중고교 시절 감독들의 입을 통해서였다. 제3자를 통해 아버지의 그림자만 보게 되다니. 나이가 들면서 스타 감독을 아버지로 둔 것이 얼마나 고단한 일인지도 알게 됐다. 자신도 모르게 착한 아들 콤플렉스에 걸렸다. 세상을 향해 삿대질도 해보고, 일상에서 벗어나보고도 싶었지만 마음과 달리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야구도 그렇게, 좀 더 독하고 개성 있게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이러다 내 인생은 사라지고 아버지의 아들로만 남는 게 아닌가.

○ 수많은 자식들. 친아들도 그중 하나일 뿐

나는 수백 수천 명의 자식이 있다. 40년 가까이 수없이 잘리고, 여러 팀을 옮겨 다녔으니 그렇게 됐다. 선수든 코치든, 나이가 많든 어리든 내가 데리고 있는 식구면 모두 내 자식이다. 나에게 몸을 맡긴 이상 그들의 인생은 내가 책임져야 한다. 피붙이 아들은 하나밖에 없지만 친자식이어서 오히려 챙겨주지 못한 부분이 더 많았다. 1980년대 중반 OB 감독 시절 마산 캠프에서였다. 고등학생 아들의 훈련장이 근처에 있어 찾아갔다. 감독이 마침 제자였으니 편하게 몇 마디 했다. 그런데 분위기가 싸늘했다. 이후 아들의 팀을 찾은 적이 없다. 어떨 땐 1년에 집에 들어가는 날이 일주일 남짓이었으니 자녀 교육은 오로지 아내의 몫이었다. 2000년대 들어선 아들과 같은 유니폼을 입기도 했지만 아버지가 아닌 감독으로서 대했다. 그러고 보면 역차별을 당했을 수도 있었겠다.

김성근 고양 원더스 감독(70)과 김정준 SBS-ESPN 해설위원(42). 이들 부자의 관계를 쉽게 이해하려면 김성근의 독특한 야구관을 먼저 다루는 게 순서일 듯싶다. 김성근은 김인식(전 한화 감독)처럼 ‘국민 감독’은 아니다. ‘야신(野神·야구의 신)’으로 불리지만 그를 곱게 보지 않는 시각들이 있기 때문이다. 일부 팬은 물론이고 그가 승리를 안겨주는 소속 구단조차 그를 부담스러워하는 경우가 많았다. 제 식구만 챙기기, 승리 지상주의 등 여러 말이 나왔다. 예전에는 재일교포에 대한 편견도 있었다. 하지만 그의 사전에 타협이란 단어는 없었다. 앞에서 그가 언급한 것처럼 그에겐 인생을 책임져야 할 수많은 자식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이런 그에게서 경영의 새로운 기법을 배우겠다며 기업체의 강사 초빙이 줄을 이었으니 아이로니컬하기까지 하다. 반면 야구를 향한 그의 몰입은 가족들에겐 고스란히 빚이 돼 돌아왔다. 11일 고양야구장에서 이들 부자를 만났고, 인터뷰는 따로 진행했다.

○ 처음으로 나눈 대화

정준이가 중학교 3학년 때 야구를 그만두겠다고 했다. 어려서부터 야구만 하느라 영어 수학의 기초는 안 돼 있었지만 공부는 곧잘 하는 편이었다. 반에서 10등 안팎. 몇 개월 공부하더니 특기생이 아니라 시험을 쳐서 고교에 들어갔다. 그때 공부를 계속했거나 아니면 한눈팔지 않고 야구를 계속했더라면. 연세대 신입생 때는 구타를 못 이겨 다시 야구를 그만두겠다고 해 한바탕 난리가 나기도 했다. 그리고 2년 후 서울에 홍수가 나 성수동 집에서 여관으로 피신을 했는데 충격적인 얘기를 들었다. 김성근의 아들이라 경기에 나간다는 등 주위에서 말이 많았던 모양이다. 자살하러 한강에 몇 번 갔다는 얘기를 들었다. 아들과 심각하게 나눈 첫 대화였다. 아찔했다.

김정준은 이 부분에 대해선 말을 아꼈지만 아버지로부터 “네가 어떤 선택을 하든지 설령 거지가 되더라도 너는 내 아들이다”는 말을 들었고 큰 힘이 됐다고 했다. 2루수였던 김정준은 1992년 프로에 입단할 때도 특혜를 봤다는 수군거림을 들었다. LG에서 팀 내 12번째로 지명됐고 1군 무대엔 10경기에 나가 안타 2개를 친 게 고작이었다. 그리고 이듬해 대학 때부터 앓았던 허리부상으로 은퇴했으니 그런 말이 나올 법도 했다.

○ 백 마디 말보다 소중한 교훈

아버지는 내가 어릴 때부터 감독이었고 지금도 감독이다. 물론 30대의 김성근은 70대의 김성근과는 달랐을 것이다. 사실 아버지가 신은 아니지 않은가. 프런트로서, 전력분석 코치로서 감독님(김정준은 평소 아버님보다 감독님이란 호칭을 자주 쓴다)을 LG에서 2년, SK에서 5년 모셨다. 그동안 5번 한국시리즈에 나가 3번 우승했다. 아들이 아닌 같은 야구인의 시각에서 감독님을 중립적으로 보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려고 애썼다. 내가 감독이라면 구단이나 한국야구위원회(KBO)와 저렇게까지 불꽃을 튀기지는 않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도 있지만 야구에 대한 기본적인 생각은 다르지 않다. 대장이 타협을 하면 조직의 근간이 무너진다. 김인식 야구는 잘될 때는 한꺼번에 에너지를 폭발시키지만 끈끈함은 떨어진다. 김성근 야구는 팽팽한 긴장감에 조직원들이 당장엔 힘들지만 나중엔 마음을 열게 되고 그 열매가 보장된다. 서로 장단점이 있다. 아들로서 무엇보다 자랑스러운 것은 평생 태산처럼 한결같은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백 마디 말보다 소중한 교훈이었다.

○ 아들은 인생의 동반자

아들이 선수로서 대성하지 못했지만 결과를 놓고 아쉬움은 전혀 없다. 그래도 전력분석에 관한 한 일가를 이루지 않았나. 다만 보통 아버지들과는 달리 그동안 내가 마음 고생시킨 게 미안할 따름이다. 구단과 나의 중간에 끼어 많은 상처를 받았을 것이다. 요즘은 내가 정준이한테 많이 배운다. 2007년 두산과 한국시리즈에서 초반 2연패를 했을 때 패장이 고개만 숙이고 있으면 어떡하느냐는 메일이 왔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리고 4연승했다. 올해 한화에서 감독 제의가 왔을 때 한대화 감독이 중도 해임되는 모습을 보고 고양과 2년 재계약 결심을 굳힌 것도 아들의 충고 덕분이었다.

김성근은 한 인터뷰에서 김정준을 인생의 파트너로 인정했다. 이를 본 아들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한 길을 걷는 즐거움. 보통의 가정이 누리지 못하는 행운이리라. 마침 이날 고양야구장에선 입단 테스트가 있었다. 프로에서 버림받았거나 지명조차 받지 못한 무명 선수들이 모이는 이곳. 김성근의 자식이 되기 위한 입양권을 얻기 위한 치열한 경쟁을 지켜보면서 김정준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장환수 스포츠전문기자 zangpab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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