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시황릉 여산에 만들어진 이유는?”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4월 18일 06시 1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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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빛과 그늘' 출간

장장 38년간 약 80만 명을 동원해 조성했다는 중국 진시황릉. 1974년 처음 발굴한 이후 8000개가 넘는 실물 크기의 병마용이 발견돼 세계를 놀라게 한 이곳 능원의 조성 과정은 아직도 베일에 싸여 있다.

중국을 처음 통일한 진시황은 함양에서 집권했는데 능원은 어째서 그곳에서 꽤 멀리 떨어진 여산을 택했을까?

북위 사람 역도원이 지은 인문지리서 '수경주'에는 "진시황 때에는 후하게 매장하는 것이 성행했다. 무덤 자리로 여산, 일명 남전을 선택한 것은 그 남쪽에 금이 많고 그 북쪽에 좋은 옥이 많이 나는 관계로 진시황이 명성을 탐했기 때문"이라고 기록돼 있다.

이 주장은 1000년이 넘게 가장 권위있는 관점으로 평가받아 왔지만 과연 그럴까.

중국 섬서성 출신으로 병마용 발굴대장을 맡았던 고고학자 장점민(58)은 저서 '제국의 빛과 그늘'에서 "수경주의 해석은 언뜻 일리가 있지만 의문이 생긴다"고 말한다.

그는 "능원을 조성하기 시작했을 때 진시황은 열세 살에 불과했고, 금과 옥에 대해 알았다 하다라도 무덤 자리를 혼자서 결정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이 문제는 당시 예제와 능묘 설계의 의도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진시황의 선조와 태후의 능원이 임동현 서쪽 지양 일대에 자리 잡은 것을 생각할 때 진시황의 무덤 자리로 지양 동쪽 여산을 선택한 것은 당시 예제에 따른 것"이라고 설명한다.

'예기'와 '이아' 등의 기록에 따르면 "남·북·서쪽이 윗사람이 자리이고, 서남쪽 귀퉁이 깊숙한 곳이 연장자의 자리"이다.

따라서 진시황 능원이 여산 기슭에 자리 잡은 것은 후손은 동쪽에 위치한다는 예제에 따른 것이지 진시황이 금이나 옥을 좋아했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진시황릉과 병마용갱을 비롯해 능원 유적을 40년 가까이 발굴하고 연구해온 저자는 이 책에서 능원 건설 프로젝트가 어떻게 시작됐는지, 책임자는 누구였는지, 공사에 쓸 돌과 나무는 어디서 가져왔는지, 벽돌과 기와는 어디서 구웠을지 등을 꼼꼼한 기록을 통해 생생하게 들려준다.

디지털뉴스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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