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칼럼]<손택균의 카덴차>‘세상의 모든 계절’ 사용기(私用記) : 전등갓 위 나방의 추레한 안온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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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4월 6일 12시 4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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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는 ‘Another Year’. 영화 초반 아내 제리(왼쪽)가 심리상담을 온 여인에게 묻는다. “바라는 게 있나요?” 웃음기를 빼고 석고를 뜬 듯한 얼굴로, 여인이 답한다. “다른 삶.” 사진제공 진진
원제는 ‘Another Year’. 영화 초반 아내 제리(왼쪽)가 심리상담을 온 여인에게 묻는다. “바라는 게 있나요?” 웃음기를 빼고 석고를 뜬 듯한 얼굴로, 여인이 답한다. “다른 삶.” 사진제공 진진

동등한 관계 맺음은 없다.
10년 전 겨울저녁. 한적했던 압구정동 카페에 앉아 그런 대화를 했다.
"결국 돌아보면 누군가 한쪽이 다른 한쪽을 '더 좋아했던' 걸 거야"라고.
남의 일인 양. 그렇게 말했다.

소박한 행복, 밝고 따뜻한 마음을 성실하게 지켜내며 살아가는 이들 주변에는 언제나 사람이 모여든다.
존재를 위해 필요한 힘을 태양으로부터 얻으며 그 주변을 빙빙 맴도는 행성들처럼.
좀 저열하게 연상하면, 등불에 달려드는 나방 떼처럼.
전등갓에 붙어 앉은 나방은 나름, 행복해 보인다.
하지만 갓 아래로 몸을 들이미는 순간
'치직'
실낱같은 행복을 붙들고 있던 나방은 처참하게 눌어붙은, 너저분한 쓰레기가 된다.

영화 속 '태양'은 톰과 제리 부부다.
남편 톰은 토목기술자, 아내 제리는 심리치료사. 두 사람 모두 안정적이고 여유로운 직장생활을 유지하며 런던 외곽에서 수십 년을 함께 살아왔다. 서로를 진심으로 보듬어 안고, 작고 예쁜 텃밭도 정성들여 일구면서. 걱정이 있다면 장성한 외아들 조이가 아직 적당한 짝을 찾지 못한 것 정도다. 하지만 워낙 심성 곧고 건실한, 멋진 아들이니 조만간 좋은 인연을 만나리라 믿는다. 가끔 집에 들러 밭일을 돕는 아들의 뒷모습이 그저 문득문득 안쓰러울 따름이다.

톰의 친구 켄. 이들 부부의 집을 찾아왔을 때만 행복하게 웃을 수 있는 사람이다. 그 외의 시간은 맥주와 감자 칩, 축구로 연명한다. 술 취해 오열하는 켄에게 톰이 말한다. “대체 너를 어쩌면 좋니…. 계속 그렇게 살 수는 없어.” 사진제공 진진
톰의 친구 켄. 이들 부부의 집을 찾아왔을 때만 행복하게 웃을 수 있는 사람이다. 그 외의 시간은 맥주와 감자 칩, 축구로 연명한다. 술 취해 오열하는 켄에게 톰이 말한다. “대체 너를 어쩌면 좋니…. 계속 그렇게 살 수는 없어.” 사진제공 진진

제리의 직장동료 메리, 톰의 죽마고우 켄이 차례차례 이들의 집을 찾아온다.
메리와 켄은 모두 배우자 없이 쓸쓸하게, 꾸역꾸역 무의미한 삶을 이어온 신세. 마음에 더께 쌓인 외로움, 힘겨움, 서글픔의 짐을 톰과 제리 부부와의 만남을 통해 이따금씩 털어내고 한숨을 돌리는 사람들이다.
메리와 켄에게 이들 가족은 달리 대안을 찾을 수 없는, 안온한 치유의 소중한 근원 같은 존재다.
전등갓에 붙어 앉은 나방이 느낄 듯한, 안도감.

저녁식사를 마친 뒤 둘러앉은 화톳불 앞. 혼자 연신 맥주를 들이키다가 험하게 취해버린 켄이 울먹이며 말한다.
"다 내 잘못이야. 내 곁엔 아무도 없어. 희망도 없고."
전등갓에 붙어 앉은 나방을 닮은, 추레함.

제리와 톰 부부는 애니메이션 ‘톰과 제리’와 달리 수십 년을 아무 탈 없이 해로해 온 행복한 부부다. 그들을 방문하는 친구들은 이 부부의 삶을 가득 채운 온기에 기대 지친 마음을 달랜다. 사진제공 진진
제리와 톰 부부는 애니메이션 ‘톰과 제리’와 달리 수십 년을 아무 탈 없이 해로해 온 행복한 부부다. 그들을 방문하는 친구들은 이 부부의 삶을 가득 채운 온기에 기대 지친 마음을 달랜다. 사진제공 진진

톰과 제리 부부가 마련한 소박한 가든파티에 뒤늦게 나타난 메리는 새로 산 (하잘것없는) 중고차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의도적으로, 노골적으로 유도한다.
"나 차 샀다고. 제발, 좀 알아줘. 감탄해 줘"라고 내놓아 말하는 편이 나을 법한, 낯간지러운 설레발이다.
얼굴근육에 잔뜩 힘을 주며, 메리가 힘겹게 말한다.
"난 그냥 하루하루, 즐겁게 살려고요."
아무도 묻지 않은, 뜬금없는 이야기다.

제리는 그런 메리에게 켄이라는 남자의 장점을, 존재를, 넌지시 알려준다.
메리의 눈길과 발길이 향하는 방향은 엉뚱하다.
"너에게는 삶이 친절하니? 나 아니면 누가 나한테 선물을 주겠니? 네가 혹시…, 내 차 이름을 지어줄래?"
상식적으로, 친구의 장성한 총각 아들에게는 하기 어려울 이야기. 선량한 친구들의 소중한 아들에게는 던지지 않을, 끈적끈적한 눈빛이다.

착한 사마리아인이 괴팍하고 무례한 손님에게 베풀 수 있는 용인의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제리가 메리에게 조용히 건네는 말은 사적인 경험에 비추어 알기로 사람이 타인에게 할 수 있는 가장 가슴 아픈 말 중 하나다.
"난 너에게 화가 난 게 아니야. 실망한 거지."

제리의 직장동료 메리(가운데). 엄격히 말하자면 심리치료사의 업무를 보조하는, 동료가 아닌 비서다. 그런 서열 따위 상관하지 않고 고독한 어깨를 친구처럼 감싸준 제리에게, 메리는 상식 밖의 응석을 부린다. 사진제공 진진
제리의 직장동료 메리(가운데). 엄격히 말하자면 심리치료사의 업무를 보조하는, 동료가 아닌 비서다. 그런 서열 따위 상관하지 않고 고독한 어깨를 친구처럼 감싸준 제리에게, 메리는 상식 밖의 응석을 부린다. 사진제공 진진

외롭게 늙는 일에 대한 두려움. '왜 나만 불행할까?'하는 생각에 사로잡혀 늘어놓는 술주정의 지저분함. 다음날 아침 건네는 사과의, 부질없음.
나이 들어 홀로 있더라도 추해지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는 사이, 서글픈 문장으로 조직한 대사들이 덤덤하게 쏟아져 지나갔다.
메리는 톰과 제리 부부가 없는 사이 그들의 냉장고를 열어보고 말한다.
"뭐가 이리 많아. 내건 텅 비었는데."

윤상이 2000년 발표한 앨범 'Cliche'의 수록곡 '결국 흔해빠진 사랑얘기'에 이런 가사가 나온다.
"누구와 누가 또 헤어졌다는, 흔해빠진 이별 노래
거짓말처럼 만났다가 결국은 헤어져버린 이야기.
'죽도록 사랑했다'고 '내가 제일 슬프다'고
저마다 애타게 하소연하는, 결국 똑같은 사랑 노래."

상처(喪妻)한 톰의 형을 만난 메리. 묻지도 않은 자신의 이야기를 다시 버릇처럼 늘어놓는다. 불행은 연대할까. 연대하면 덜어질까. 그랬으면 좋겠지만, 각자의 몫이다. 아무 상관없는. 사진제공 진진
상처(喪妻)한 톰의 형을 만난 메리. 묻지도 않은 자신의 이야기를 다시 버릇처럼 늘어놓는다. 불행은 연대할까. 연대하면 덜어질까. 그랬으면 좋겠지만, 각자의 몫이다. 아무 상관없는. 사진제공 진진
동물원이 1993년 발표한 5집 두번째 타이틀곡의 가사는 이렇다.
"한 남자를 알고 있어.
그가 만졌던 모든 것에 깊은 상처를 준
또 마치 필연인 듯 그 역시 상처를 받은
혼자만의 삶으로 황폐하게 남겨진.
'나를 위해 걱정하지 마'
'나를 위로하려 하지 마'
그는 이렇게 말해.
변명은 언제나 허위에 지나지 않을 뿐
내가 원했기에 이 길로 들어선 것이라고."

노래의 제목은 '모든 걸 다 가질 순 없어'다.
메리에게 들려줘봤자, 시간 낭비일 것.

다 그저, 나름대로 살아가는 거다.

ps.
"참 좋다" 했더니, 누가 그랬다.
"이 영화가 좋다면 나이 들었다는 증거에요."

그래도,
좋더라.
★★★★(다섯 개 만점)


▲ 영화 ‘세상의 모든 계절’ 예고편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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