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칼럼]<손택균의 카덴차>이탈리아에서 건너온 기이한 식탁(食卓). ‘아이 엠 러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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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2월 8일 14시 5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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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사진 안에 각각 따로 우뚝 선 가족들. 견고해 보이는 외양만큼 강인할까. 이 사업가 집안의 중요한 ‘전통’은 ‘지지 않는 것’이다. 스포츠 경기에서 장남이 우승하지 못했다는 것이 이들에게는 믿기 어려운 뉴스다. 관성이 확고한 사물처럼, 일단 무너지면 단번에 와르르 무너질 수밖에. 사진 제공 조제
하나의 사진 안에 각각 따로 우뚝 선 가족들. 견고해 보이는 외양만큼 강인할까. 이 사업가 집안의 중요한 ‘전통’은 ‘지지 않는 것’이다. 스포츠 경기에서 장남이 우승하지 못했다는 것이 이들에게는 믿기 어려운 뉴스다. 관성이 확고한 사물처럼, 일단 무너지면 단번에 와르르 무너질 수밖에. 사진 제공 조제

'삶'이라는 쇼의 메인 스테이지는 어쩌면, 식탁이다.

최장기 고정 출연 패널인 가족들의 온갖 기쁘고 슬프고 때로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생애 단 한 번뿐인 (편이 좋은) 달콤 짜릿한 청혼의 시간, 오래 공들인 사업 파트너와 결정적 계약을 체결한 뒤 악수와 포옹을 나누는 온몸 저릿한 몇 분, 감정의 천칭에서 내려가기로 결심한 연인의 통고를 삼켜야 하는 백짓장 같은 찰나. 기타 등등.

메뉴가 무엇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결정적 순간에는 식탁 언저리의 얼굴만 보이니까. 음식은 눈에 들어올 겨를이 없다. 입에 넣고 목으로 넘기긴 해도 무슨 맛이었는지 생각나지 않는다. 당연한 듯 접시와 그릇은, 절반 정도만 비워지기 마련이다.

지난달 20일 개봉해 은근히 뜨거운 반향을 일으키고 있는 영화 '아이 엠 러브'의 키워드도 어쩌면, 식탁이다.

이탈리아 밀라노의 부잣집 레키 가(家) 맏며느리 엠마(틸다 스윈튼)가 집안 어르신 생신을 맞아 가족석찬 좌석 배치를 고심하는 장면이 이야기의 출발점. 이후 두 시간 동안 벌어지는 뒤죽박죽 대소사의 전개, 절정, 파국은 모두 이곳저곳의 '식탁'을 옮겨가며 벌어지고 맺어진다.

명절을 계기로 한해 두어 차례만 의무적으로 식탁에 둘러앉는 가족들이 대화의 접점 찾기에 난감해하다가 쉽게 붙드는 소재. 당장 눈앞에 놓인 음식이다.

섬유사업으로 갑부가 된 어르신의 생신을 축하하러 모인 레키 가문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가족만찬 때마다 식탁에 오르는 멀건 수프 험담에 왁자한 웃음을 터뜨리지만 머리와 마음속은 한결같이 딴생각이다.

딴생각 주제도 한결같다. 상속의 향방.

사랑하는 딸이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운명의 연인을 만났다고 고백한다. 그런데 그녀의 연인은, 여자다. 어머니는 딸에게 어떤 웃음을 지어야 할까. 사진 제공 조제
사랑하는 딸이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운명의 연인을 만났다고 고백한다. 그런데 그녀의 연인은, 여자다. 어머니는 딸에게 어떤 웃음을 지어야 할까. 사진 제공 조제

목적을 잃고 그저 연명하는 삶이 아니라면, 누구에게나 꿈으로 품고 살아가는 '소망의 순간'이 있다. 속내를 헤아릴 길 없는, 한없이 인자한 얼굴로 한없이 잔인한 고집을 피우는 레키 어르신이 사업과 재산의 승계자로 맏아들 탄크레디를 지명한 순간. 맏며느리 엠마는 왈칵 감격의 울음을 터뜨린다.

종갓집 살림꾼에서 안방마님으로 평생보장 승격이 확정된, 소망의 순간인 것. 아들 에도아드로가 공동 상속인으로 지명된 데 대해 '아버지' 탄크레디는 분노의 표정을 애써 눌러 감추지만, 어머니 엠마로서는 이러나저러나 그저 기쁘기만 할 따름이다.

영화 시작 10여 분 만에 주인공의 결정적 순간이 소비됐다. 나머지 1시간 40여분 동안, 무슨 이야기를 할까.

익숙한 할리우드 드라마와 달리 '아이 엠 러브'에는 무게중심을 잡는 큼지막한 이야기 덩어리가 없다. 스크린 밖에서 사람들이 징글징글 붙들고 살아가는, 영화 같지 않은 현실세계의 가족 이야기가 대개 그렇지 않던가. 형제 중의 누군가가 결혼 또는 출산의 환희를 만끽할 때 다른 누군가는 어딘가에서 이별이나 죽음을 납득하려 애써야 할 수 있다. 마음의 반응을 이성적으로 가눌 수 있도록 사건이 자애롭게 순차적으로 벌어지지도 않는다.

'아이 엠 러브'는 영화보다 현실을 닮았다. 어떤 특정 사건이 다른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식의 방점을 어디에도 두지 않는다. 사랑하는 이와 가정을 꾸릴 기쁨에 겨워하는 아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어머니. 마음 한편으로는 며칠 전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고백한 딸에게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 당연히, 어떤 상념이 다른 무엇보다 더 무겁거나, 앞서거나, 중요할 수 없다. 가족의 일이란 게, 그렇다.

주인공 엠마가 어떤 장면에서 처음으로 마음 놓고 밝은 웃음을 짓는지 눈여겨 찾아보길 권한다. 삶의 어떤 장면에서, 우리는 그렇게 마음 놓고 밝게 웃는가. 사진 제공 조제
주인공 엠마가 어떤 장면에서 처음으로 마음 놓고 밝은 웃음을 짓는지 눈여겨 찾아보길 권한다. 삶의 어떤 장면에서, 우리는 그렇게 마음 놓고 밝게 웃는가. 사진 제공 조제

양성(兩性)을 오가며 살아가는 기이한 주인공을 연기한 '올랜도'(1993년) 이후 '나니아 연대기' '콘스탄틴' 같은 상업영화에서 독특한 이미지로만 소비돼 온 틸다 스윈튼의 진가를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시종 충만하다. 매끄러운 이탈리아어 대사는 그녀가 정말 영국 태생인지 의심하게 만든다. '양희은을 모창하는 이승환을 모창'하듯 '러시아 태생의 이탈리아 이민자'를 연기한 오묘한 억양의 대사. 물론 이탈리아어라고는 'grazie'밖에 모르는 자의 무지 탓일 수 있겠지만, 케임브리지를 졸업한 엘리트 배우라고 해서 모두 저렇게 눈 돌아갈 만큼 디테일한 연기를 해낼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지난달 말 열린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평생공로상을 받은 배우 로버트 드 니로는 "40년 연기 인생을 3분여의 하이라이트로 요약한" 행사 주최 측에 뼈 있는 농담을 던졌다. 2시간여에 걸친 이야기를 짤막한 주제문으로 요약하길 좋아하는 관객에게 '아이 엠 러브'는 도무지 갈피를 잡기 힘든, 지루한 영화일 수 있다.

그러나 익숙하지 않은 양태의 초반을 넘긴 어느 시점부터 이 이야기는 헤아릴 길 없는 두께의 공간감을 가진 미술관을 닮아간다. 한 번 둘러보는 것만으로는 "온전히 둘러봤다"고 말하기 힘든.

영화 후반부 처음으로 길게 이어지는 부부의 대화. 카메라의 시선은 줄곧 은은히 흐르면서 두 사람 주변을 맴돈다. 함께 살아 오래 묵은 사랑이 자주 전혀 다른 어떤 것이 되어 끝나버리는 까닭을 캐묻듯. 사진 제공 조제
영화 후반부 처음으로 길게 이어지는 부부의 대화. 카메라의 시선은 줄곧 은은히 흐르면서 두 사람 주변을 맴돈다. 함께 살아 오래 묵은 사랑이 자주 전혀 다른 어떤 것이 되어 끝나버리는 까닭을 캐묻듯. 사진 제공 조제

탄크레디와 엠마의 대화를 잡아낸 막바지 몇 분은 혼(魂) 파편을 녹여낸 조각상의 감흥을 준다. 두 사람이 주고받는 언어의 리듬을 쫓아 미묘한 속도로 미장센이 미끄러져 움직인다. 화면 구도와 인물 위치 설정의 비례는 한 순간도 흐트러짐을 보이지 않는다. 쾌감의 탄식을 터뜨리게 하는 집요함이다.

주방에서 식당까지 음식을 하나하나 운반하고 서빙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얼마나 기괴한 느낌을 줄 수 있는지. 먹지 못하고 남은 수프 그릇을 치우는 무표정한 사람들의 모습이 주어진 상황에 따라 어떻게 섬뜩해질 수 있는지. 하나하나 아무 연관 없이 식탁 위에 올려진 듯한 접시들이 어느 특별한 하루저녁의 만찬을 완성하듯이, 툭툭 예정 없이 벌어지는 듯한 개개인의 사연이 한 가족에 어떤 뜻밖의 파국을 안길 수 있는지.

영화를 그림에 비한다면 '아이 엠 러브'는 정물화다.

레즈비언임을 고백하는 딸아이 앞에 선 어머니의 표정 변화보다는, 그 어머니의 시선을 붙든 수영장 위 빗방울에 카메라를 고정한다.

소싯적 학교 미술시간에 누구나 한 번쯤 정물화를 그린다. 하지만 미술관에서 드물게 보는 것이 또한 정물화다. 얼마나 많은 미술관에 가 보았으며 미술에 대해 얼마나 알겠느냐마는, 얄팍하기 그지없는 경험에 기대 개인적으로 찾은 까닭은, 그것이 보는 이에게 제공할 수 있는 해석의 두께에 한계가 있는 탓 아닐까 싶다.

이 영화. 정물화인 채로, 무겁고 깊고 두툼하다. ★★★☆(다섯 개 만점)

손택균기자 soh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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