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현두]서울대 합격자 수 보도 後記

  • 입력 2009년 2월 18일 02시 58분


2009학년도 대학 입시가 끝나고, 지난주 전국 고교별 서울대 합격자 수(12일자 A2·15면)를 보도하면서 20여 년 전 고교 시절 교감 선생님이 떠올랐다.

대학 입학 지원서에 도장을 받기 위해 교무실 문을 열었을 때다. 같은 반 친구 녀석이 교감 선생님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학과에 상관없이 무조건 서울대를 지원하라는 교감 선생님과 서울대가 아니더라도 원하는 학과에 가겠다는 그 친구의 신경전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서울대가 아니면 입학 지원서에 학교 직인을 찍어주지 않겠다는 교감 선생님의 협박(?)은 비단 그 친구에게만 가해진 것이 아니었다. 선생님의 협박은 대부분 미수에 그쳤다. 그래도 ‘피해자’만 달라졌을 뿐 해마다 되풀이됐다.

사회 분위기도 그랬다. 매년 대학 합격자 발표 때가 되면 신문과 방송은 전국 고교별 서울대 합격자 수를 톱뉴스로 다뤘다. 서울대 합격자 수가 곧 학교의 서열이었다.

요즘 고교생들은 서울대보다 치·의대와 한의대를 먼저 고른다. 치·의대와 한의대가 중요하지, ‘무슨 대학 치·의대’인지는 크게 관계없다. 교감 선생님들도 치·의대 진학을 권장한다. 이젠 서울대 합격자 수로 학교를 서열화하는 것 자체가 사실 왜곡일 수 있다.

헤비급 선수와 라이트급 선수가 같은 링에 올라 경기를 치르는 현실도 간과해선 안 된다.

서울과 지방의 교육 환경은 흔한 말로 하늘과 땅 차이다. 멀리 산골 지방까지 갈 필요도 없다. 매년 여름 방학과 겨울 방학 때 서울 강남 대치동 주변에 방을 얻어 놓고 과외를 받는 비(非)서울 학교의 학생들은 이제 더는 뉴스거리도 되지 않는다.

교문만 나서면 학원이 줄을 서 있는 사교육 천국 서울의 학생과, 학원은 고사하고 변변한 통학 버스도 없어 등하교에만 몇 시간을 보내야 하는 지방 학생들을 서울대 합격이라는 한 잣대로 재는 것부터가 잘못됐다.

한 학년만 300명이 넘는 대도시의 학교와 전교생이 100명도 안 되는 지방 학교의 규모 차이를 간과한 채 결과만 비교하는 것 역시 공평하지 못하다.

이런 함정들을 알면서도 서울대 합격자 수를 보도하기로 결정한 것은 정보 공개가 가져올 더 큰 이득 때문이었다.

그동안 교육 당국은 학교 서열화를 조장한다는 이유로 학업 성취도와 관련된 정보를 숨기기에 급급했다. 마지못해 정보를 공개해도 학부모들이 원하는 수준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다 보니 자녀 교육에 대한 학부모들의 불안감은 커져갔고 그 틈을 사교육이 파고들었다. 교육 당국으로부터 원하는 정보를 얻지 못한 학부모들의 욕구 불만을 학원들이 해소해줬다.

지난해 중학생 학력진단 평가의 학교별 성적도 모두 학원들이 알려줬다. 교육 당국은 ‘평준화 파괴-학교 서열화’를 막는다며 성적을 공개하지 않기로 결정했지만, 그런 네거티브 판단이 결국 학부모들의 학원에 대한 의존도만 키워줬다.

병은 많이 알려야 더 잘 치료할 수 있다는 옛말이야말로 오늘 우리 공교육 살리기의 첫 번째 처방전이 돼야 한다. 그제 공개된 초등학교 6학년, 중학교 3학년, 고등학교 1학년 전국 학력평가 결과도 마찬가지다. 뚜껑을 열어보니 ‘이 정도인 줄은 몰랐다’는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로 학력 격차가 컸다.

진실은 원래 불편한 것이다. 하지만 알고 싶지 않아도 알아야 할 일이 있다.

이현두 교육생활부 차장 ruch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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