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서영아]日의 위기감과 여유교육 논쟁

  • 입력 2008년 3월 13일 03시 03분


교육은 그 사회의 축소판이라던가. 며칠 전 방영된 NHK의 교육 관련 토론에서 일본의 두 얼굴을 보는 듯했다. 아직 여유를 잃지 않으려는 일본과 현실에 초조함을 느끼는 일본의 모습이 그것이다.

토론에는 교육관계자, 기업인, 학부모, 학생들까지 참여해 도쿄 스기나미(杉竝) 구 와다(和田)중학교의 사례를 놓고 열띤 공방을 벌였다. 학교 내에서 상위권 학생들을 위한 야간학원수업을 시작한 이 학교의 방침이 공교육으로서 옳으냐는 것이 논제였다.

하지만 토론은 원점을 맴돌기만 했다. 사카키바라 에이스케(신原英資) 와세다대 교수 같은 사람은 교육의 효율과 경쟁력 제고를 위해 특단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후지와라 가즈히로(藤原和博) 와다중 교장은 “상위권을 끌어올리면 전체가 올라간다”고 주장했다.

반면 일부 학부모나 교육관계자는 “공교육은 하위권 학생을 끌어올리는 데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며 평등주의를 앞세웠다.

더욱 눈길을 끈 것은 온라인 화상으로 토론에 참여한 중고교생들의 반응이었다. 이들은 토론자가 효율이나 경쟁력에 대해 말하면 대부분 ‘반대’ 팻말을 흔들었다. 다른 토론자가 평등과 온정을 말하면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이라 쓰인 팻말을 높이 들어보였다.

토론이 진행되면서 이런 도식적인 반응은 조금씩 허물어졌지만 ‘유토리(여유) 교육’의 철학은 여전히 학생들에게 위력을 떨치고 있음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사실 일본의 교육 현장을 취재하다 보면 늘 ‘교육열’이란 개발도상국에나 있는 것이고 이미 ‘성숙사회’로 진입한 일본에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논리와 만나게 된다. 선진국의 교육은 학력보다는 ‘살아가는 힘’을 길러주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는 얘기다.

하지만 일본이 처한 현실을 보면 마냥 여유만 찾을 수는 없어 보인다. 근래 들어 부쩍 일본의 쇠퇴를 걱정하고 국제적 영향력 저하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구태의연한 정치가 개혁의 발목을 잡는 일본의 현실을 ‘JAPAiN(JAPAN+pain)’이란 말로 비꼰 지난달 말 영국 시사주간 이코노미스트의 기사는 일본인들에게도 상당히 아팠던 듯 여러 곳에서 회자되고 있다. 세계 경제에서 일본이 차지하는 비중이 10% 이하로 떨어진 현실이 경제뿐 아니라 외교나 안보 영역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염려도 커지고 있다.

물론 다양한 원인 분석이 쏟아진다. 글로벌화에 발 빠르게 대응하지 못했고 행정과 경제 개혁이 부진했던 점이 거론된다. 하지만 쇠퇴하는 일본, 작아지는 일본의 좀 더 근본적인 배경에는 아직도 여유를 앞세우는 일본인들의 생각이 자리잡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한편으로 일부 일본인의 위기의식에는 또 다른 함정이 있다. 일본에서 ‘살아 있는 정치교과서’로 추앙받는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전 총리는 얼마 전 강연에서 “2008년은 난(亂)의 해”라며 ‘하강 중인 일본’에 경종을 울렸다.

이런 그의 지론은 헌법 개정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진출 등을 통한 일본 정신의 회복이다. 그는 이번에도 “미국은 상당히 피로해 있다. 미국이 더는 핵무기로 일본을 지켜주지 않겠다고 말할 때 일본은 비핵 3원칙을 재검토할 수 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일본은 여유와 위기의식 중 어느 쪽에 쏠릴까. ‘여유’에 방점이 찍힌다면 날로 고령화하는 사회에서 생활을 즐기는 일본인들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위기’가 강조된다면 나카소네 전 총리 말대로 강한 일본이 부활할지도 모른다. 한국도 관심을 갖고 지켜봐야 할 대목이다.

서영아 도쿄 특파원 sya@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