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서하진]“아빠, 사랑해요”

  • 입력 2007년 9월 8일 02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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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초 아들아이와 함께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대학 2학년이나 된 아이를 혼자 보내지 못한 것은 입학할 학교가 결정되지 않은 탓이었다. 떠나던 날 남편은 일찍 퇴근해 공항으로 배웅을 나왔다. 이런저런 주의사항을 일러 주는 아빠에게 “걱정 마시라” 씩씩하게 대답하던 아이가 출국장 유리문 안으로 들어서다 말고 “잠깐만요” 하고 몸을 돌리더니 우두커니 서 있는 저편의 아빠를 바라봤다. 아이는 “아빠, 아빠” 두 번 큰 소리로 부르고는 시멘트 바닥에 넙죽 엎드려 큰절을 했다. “다녀오겠습니다” 외치는 아이의 음성도, 유리문을 사이에 두고 절을 받는 남편의 눈빛도 흔들리는 것 같았다.

그로부터 3주간 미국의 10여 군데 대학을 순례하는 동안 전화를 걸면 초등학생인 막내는 “엄마 언제 오느냐” 번번이 확인을 했고 대학생인 큰딸은 “천천히 일 잘 보시고 오세요” 하다가도 “사실 아빠 때문에 죽겠어” 했다. 죽겠는 사정이야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는 터였으므로 나도 저도 더 얘기하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한 대학에 입학 허가를 받고, 거처를 정하고, 침대 책상 자전거 휴대전화 밥솥 프라이팬 이불 베개 따위의 물품을 작전 수행하듯 구입해 주고 부리나케 돌아온 저녁, 나는 엄청난 미션을 완성한 요원처럼 그간의 일을 구구절절, 과장 섞어 늘어놓았다. “그랬구나, 역시 우리 마누라 훌륭하다” 추임새처럼 맞장구를 쳐 가며 들어 준 남편이 이제 내 차례라는 듯 “아유∼ 얘들이 말이야” 하면서 두 딸아이와의 시간을 줄줄이 엮어 냈다.

어렵고 고단한 아빠라는 자리

막내를 데리고 매일 산책을 했으며 어느 날은 강아지와, 어느 날은 아이의 친구와 어떻게 시간을 보냈으며 또 어느 날은 귀가가 늦은 큰딸아이를 어떻게 훈계했으며 어떤 말로 회유해서 야적장 수준이던 큰딸아이의 방을 저처럼 말끔하도록 만들었으며…. 그 3주간, 남편의 나날이, 들리지 않는 영어와 씨름하며 낯선 도시를 맴돌아야 했던 내 시간보다 오히려 더 치열했구나 싶었다. “아빠가 진짜 고생하셨어요” 하던 딸아이가 슬쩍 눈치를 보더니 “엄마 오시니까 정말 좋아요” 하며 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모든 문제를 아빠와 해결해야 했던 그 시간이 아이들에게도 힘겨웠으나 소중한 경험인 것 같았다. 생각해 보면 아이들의 일은 대개 엄마를 통해서, 엄마의 의견을 덧씌워서 아빠에게 전달된다. 그러므로 아빠에게 아이들이란 ‘아내가 보는 아이들’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여름, 나는 알게 되었다. 아빠들이란 엄마 하기 나름이라는 것, 그리고 이따금 엄마가 사라져 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사실.

최근 자녀가 있는 직장 남성 2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스스로 매긴 아버지로서의 점수가 59.4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결과가 나왔다. 여성가족부가 ‘육아데이’ 캠페인 시행 2주년을 맞아 한 설문조사 결과였다. 매달 6일을 육아데이로 정하고 아빠들이 정시에 퇴근해서 육아에 적극 참여할 수 있도록 배려하자는 운동이다. 좋은 일이지만, 어느 하루가 특별한 육아데이여야 할까. 사회적으로 성공을 한 아빠보다도, 경제적으로 지원을 해 주는 아빠보다도, 함께 시간을 보내고 같이 놀아 주는 친구 같은 아빠를 가장 바람직한 아버지 상이라고 대답했다는 아빠들. 그러나 경제적 지원을 해 주지 못하는, 보잘것없는 직위의 아빠가 친구 되기란 또 얼마나 지난(至難)한 일인가.

가족들이 힘 합쳐 격려해 줘야

이래저래 아빠라는 건 참으로 어렵고도 고단한 자리다. “아빠, 사랑해요”라는 말이 가장 감동적이라는 그 많은 아빠에게 내 아이들이 매일 그렇게 말할 수 있도록, 오늘 저녁, 엄마들이 먼저 말해 보자. 사랑한다, 미안하다, 그리고 고맙다고.

서하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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