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허승호]익명성의 최적 보호치는?

  • 입력 2006년 1월 31일 03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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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에서는 누구도 당신이 ‘개’라는 사실을 모른다.” 미국의 주간지 ‘뉴요커’는 인터넷 익명성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시사만화에 이런 지문을 붙인 적이 있다.

‘익명성의 가면’을 쓸 경우 자신의 또 다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미국만의 얘기는 아니다. 북한을 방문했던 임수경 씨가 지난해 7월 아홉 살짜리 외아들을 익사사고로 잃자 그 아들을 ‘빨갱이 ××’ 등으로 부르며 죽음을 조롱한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인격이 채 성숙되지 못한 미성년자였을까. 검찰 수사 결과 고발된 25명 중 21명이 40대 이상이었으며 대학교수, 금융기관 임원, 대기업 직원이 포함돼 있는 등 대부분 고학력 중산층이었다.

이들은 자기 이름을 밝히고도 그런 댓글을 달 수 있었을까. 이런 문제 때문에 정부도 인터넷 명예 훼손과 모욕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고, 대형 포털 사업자가 본인 확인 의무를 지도록 법 개정을 서두르고 있다. 인터넷 실명제를 강화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반대 의견도 만만찮다. “실명제는 표현의 자유를 제한해 새로운 토론의 장으로 떠오른 사이버 공간을 위축시킨다”는 것이다.

사실 익명성은 표현의 자유를 확대하고 근대 시민사회와 민주주의의 탄생을 가능하게 했던 중요 요소였다. 굳건하던 프랑스의 앙시앵레짐(구체제)을 무너뜨린 데는 익명의 팸플릿 역할이 컸다. 또 ‘누가 누구를 찍었는지’를 알 수 없도록 한 비밀투표는 민주주의의 토대이기도 하다.

하지만 익명성은 햇빛이나 강수량과 마찬가지로 ‘꼭 필요하긴 하지만 넘치면 부작용이 큰’ 사회적 재화의 하나다. 햇빛 없이는 생명이 존재할 수 없지만 너무 많은 일조량은 사막을 만든다. 꼭 필요한 비도 지나치면 재앙이다.

인류는 표현의 자유에 대해 만성적 갈증 상태였다. 그런데 인터넷 덕분에 표현의 자유가 넘쳐 나면서 익명의 홍수에 익사할 지경이 됐다. 경제학 용어를 빌리면 ‘추가된 익명성의 편익’에 비해 ‘지불해야 할 사회적 비용’이 급작스레 커진 것.

포털 사이트 네이버의 최근 조사에 따르면 하루 20건 이상의 댓글을 쏟아 내는 사람은 750명에 불과하다. 전체 이용자의 0.06%에 해당하는 이들이 댓글의 25%를 생산한다. 그렇다면 악플 문제의 해결은 댓글 시스템을 바꾸는 데서 시작되어야 할 것 같다. 한 사람이 달 수 있는 댓글 개수를 제한하고, 감정의 배설에 가까운 댓글이 아니라 이슈에 대해 긴 글을 쓰는 토론 형태로 바꾸는 것이다.

‘실명제 강화가 사이버 토론을 위축시킬 것’이라는 우려에 대해서는 한 포털 업체가 그렇지 않음을 입증하고 있다. 드림위즈는 1999년 출범하면서부터 실명제 원칙을 고수해 왔다. 욕설과 험구가 다른 포털 업체에 비해 현저히 적지만 회원은 1300만 명이나 되며 24시간 활발한 토론이 이뤄지고 있다. 지금은 대부분의 포털 사이트가 부분적 실명제를 도입하고 있다. 드림위즈 이인숙 기획팀장은 말한다. “실명으로 의견과 정보를 올리는 것이 불편하다는 주장을 이해할 수 없다. 적어도 상식적이고 정상적인 커뮤니케이션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표현의 자유와 그에 따른 책임의 최적 균형점은 어디인가’에 대한 고민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사이버 오물 투척 없이 건강한 토론이 활발하게 오갈 수 있는, 익명성의 최적보호치는 얼마쯤일까.

허승호 기획특집부 부장 tiger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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