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한기흥]빛바랜 청운의 꿈

  • 입력 2005년 12월 2일 03시 0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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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金大中) 정부 시절의 도청과 관련해 최근 구속된 임동원(林東源), 신건(辛建) 전 국가정보원장은 나름대로 능력을 인정받는 공직자들이었다. 과거 취재 현장에서 만난 두 사람은 지금과는 이미지가 달랐다.

1991년 어느 가을날 토요일 오후. 당시 법조를 담당하던 기자가 덕수궁 옆 대검찰청 중앙수사본부장실을 찾아갔을 때 신건 중수부장은 혼자서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며 깊은 상념에 젖어 있었다. 그는 예고 없이 방문한 기자에게 차(茶)를 권하며 이런 말을 했다.

“한 기자, 젊은 법학도였을 때는 ‘청운(靑雲)의 꿈’을 품고 공부를 했는데 나이가 들수록 그런 꿈을 간직하기가 쉽지 않습디다. 바깥을 보니 그런 생각이 드는군요….”

이유를 물었지만 그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화제를 바꿨다. ‘검찰공화국’의 실세(實勢)였던 그가 왜 그때 그런 감상에 젖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다만 오십 줄에 접어든 검찰 고위 간부가 ‘초심(初心)’을 되새기던 모습은 인상적인 기억으로 남았다.

임 전 원장은 1999년 5월 처음 통일부 장관이 됐을 때부터 기자간담회 등을 통해 “한국도 이제 고래 싸움에 등 터지는 새우가 아니라 돌고래처럼 자기를 지킬 힘과 명민함, 기동성, 누구나 좋아하는 친밀함을 가진 나라가 돼야 하지 않겠느냐”는 지론을 자주 폈다. 하드 파워와 소프트 파워를 두루 갖춘, 작지만 강한 조국을 만들고 싶다는 그의 진솔한 신념은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이제 두 사람은 그 꿈을 실현하기 힘들게 됐다. 과거의 도청에 책임이 있는지는 앞으로 법원에서 가려질 터이지만 공직자로서 유종(有終)의 미(美)를 거뒀다고는 할 수 없다. 그들은 국정원장이 되지 않는 게 더 나았을 것 같다.

역대 대통령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던 핵심 측근 중 퇴임 후 사법 처리된 사람은 한둘이 아니다. 대통령과 함께 권력의 오남용에 책임을 져야 하거나, 때론 대통령을 ‘보호’하기 위해 책임을 뒤집어써야 하는 것이 한국의 현실이다.

여기엔 여러 이유가 있겠으나 아마도 자기를 믿고 힘을 실어 주는 대통령을 과잉 보좌하느라 공복(公僕)으로서의 자세를 제대로 가다듬지 못한 것도 한 원인일 것 같다.

전두환(全斗煥) 정부 시절 요직을 두루 거친 한 인사는 “나를 낳아준 분은 부모지만 나를 알아준 분은 전두환 전 대통령”이라는 말을 스스럼없이 했다. 그는 장관으로 발탁됐을 때 집에 대통령 사진을 놓고 감사의 절까지 했다고 사석에서 말하기도 했다. 다른 고위 공직자라고 자신에 대한 임면권을 가진 대통령에 대한 태도가 크게 다를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남자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식의 전근대적인 사고가 공직 사회에서 사라지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국민이 아닌 권력에 봉사하다가 난처한 신세가 되는 공직자가 다시 안 나온다는 보장이 없다.

권력은 중독성이 강해 권력자뿐만 아니라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눈과 귀, 판단력도 마비시킨다. 유일한 해독제는 권력의 원천(源泉)이 권력자가 아니라 국민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권력자의 신임을 받는 것은 쉬워도 국민의 신뢰를 받는 것은 어렵다.

한기흥 정치부 차장 eligiu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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