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94년 성수대교 참사

  • 입력 2005년 10월 21일 03시 0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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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때문에 서둘러 나선 사람이 많았는지 도로엔 차가 많았다. 다리 위는 빗물로 미끄러웠다. 계기판을 보니 시속 30km. 다리에 들어선 지 얼마나 됐을까. 갑자기 다리 상판이 솟구쳐 올라왔다. 처음엔 지진이라도 난 줄 알았다. 순간 밑으로 떨어졌고 정신을 잃고 말았다.”

출근길에 성수대교를 건너다 차와 함께 강물로 떨어졌던 한 생존자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1994년 10월 21일 오전 7시 40분. 서울의 한 한강다리가 무너져 내렸다.

세무 비리, 지존파 사건, 장교 탈영…. 참으로 굵직굵직한 뉴스가 많았던 해였다. 32명의 목숨을 앗아간 성수대교 붕괴사고는 ‘성장 제일’을 기치로 앞만 보고 달렸던 과거를 돌아보게 했다.

성수대교는 1979년 10월 16일 완공돼 박정희 전 대통령의 마지막 작품으로 꼽힌다. 빨리, 크게, 많이 만드는 데 집착하던 시대의 산물이었다.

다리는 최신 공법을 적용해 교각 사이가 넓게 설계됐다. ‘미(美)를 고려한 첫 한강다리’라는 명성은 아이러니다.

평균 수명이 100년이라는 콘크리트 다리가 고작 15년 만에 무너졌다. ‘서울에서 나돌아 다니기 무섭다’는 외국 언론의 보도가 이어졌고 해외시장에서 주가를 올리던 ‘건설 한국’의 체면도 하루아침에 구겨졌다.

마침 ‘부실공사 추방의 해’. 하루 종일 TV에서 진행된 특별 생방송을 보면서 국민들은 허탈해했다. 출근길, 등굣길에 날벼락을 맞은 희생자들의 사연이 공개됐다. 한 여학생이 집을 나서기 몇 시간 전에 썼다는, ‘앞으로 부모님께 잘하겠다’는 내용의 편지는 수많은 사람을 울렸다.

보고를 받고 대로(大怒)했다는 대통령은 사고가 나고 3일 후 ‘부덕함’ ‘책임 통감’ 등의 표현을 동원해 대국민 담화를 발표하는 데 그쳤다. 서울시장은 물러났지만 국무위원들에 대한 해임 결의안은 부결됐다.

‘시공 불량’이냐, ‘관리 소홀’이냐를 놓고 공방을 벌이다 서울시 하위직 공무원 15명이 구속되는 선에서 마무리됐다. 이들도 1심에서 집행유예 등으로 모두 풀려났다.

문명국에선 상상하기 어려운 전형적인 인재(人災)는 결국 누구의 책임도 아닌 사고가 됐다.

홍석민 기자 smh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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