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61년 통일촉진궐기대회

  • 입력 2005년 5월 12일 19시 34분


코멘트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

학생 대표로 연단에 선 경희대생 이수병의 열변에 서울운동장(현 동대문운동장)을 메운 4만여 명의 인파는 환호했다. 1961년 5월 13일 열린 ‘남북학생회담 환영 및 통일촉진궐기대회’는 그렇게 절정으로 치달았다.

제2공화국은 통일론이 봇물을 이룬 때다. ‘북진통일’을 내세운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면서 그동안 억눌려 온 통일 열망이 분출된 것. 그 중심에는 ‘혁신계’로 불린 중도좌파 정치세력이 있었다.

혁신계는 이승만의 정적(政敵)인 조봉암이 처형된 후 구심점을 잃고 흩어졌다가 4·19혁명 이후 활동을 재개했다. 그러나 1960년 7월 총선에 200여 명이 출마해 7명만 당선되는 참패를 겪는다.

제도권 진입에 실패한 혁신계는 통일 이슈 선점을 전략으로 삼았다. 마침 북한 김일성이 1960년 8월 연방제를 제안하면서 통일논쟁이 불붙었다. 기존 체제를 일단 인정하고 민족대표자회의를 열자는 이 제안은 한국 측 입장인 ‘유엔 감시하의 남북 총선거’와 확연하게 달랐다. 또 10월에는 미국 맨스필드 상원의원이 “한국도 오스트리아처럼 중립국으로 통일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혁신계는 이들을 수용한 중립화통일론으로 여론몰이에 나섰다.

하지만 정부의 ‘선(先)건설 후(後)통일’ 기조는 단호했다. 장면 총리는 “전쟁까지 치른 나라가 소련 중공의 침략 가능성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며 통일지상주의와 선을 그었다.

그러자 대학생들이 발끈했다. 서울대를 시작으로 곳곳에서 ‘민족통일학생연맹(민통련)’이 결성됐다. 이들은 “통일을 기피하는 기성 정치인들은 물러나라”며 시위를 벌였다.

1961년 5월 3일 민통련은 판문점에서 남북학생회담을 갖자고 북한에 공식 제안했다. 정부는 “순진한 학생들을 공산당의 흉계에 넘어가게 놔둘 수 없다”며 불허 방침을 밝혔다. 열흘 뒤 열린 서울운동장 궐기대회는 그야말로 첨예한 이념 갈등의 장이었다.

일촉즉발의 상황은 3일 후인 5월 16일 박정희에 의해 허무하게 종료된다. 군부세력은 5일 만에 2000여 명의 혁신계와 학생을 체포했고 통일 논의는 긴 잠복기에 들어갔다. 서울운동장에서 열변을 토했던 이수병은 1974년의 인혁당 재건위원회 사건으로 이듬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김준석 기자 kjs359@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