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512년 아메리고 베스푸치 사망

  • 입력 2005년 2월 21일 18시 5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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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인류의 가슴 깊은 곳에 묻혀있던 그리움을 건드렸다. 도덕과 돈과 법과 소유에 대해 자유롭고 싶은 꿈도 함께.”

아메리고 베스푸치(1454∼1512).

사람의 이름이 붙은 땅의 크기로 따지면 그를 따를 사람이 없다. 그러나 만사에 어디 밝은 면만 있던가. 그것은 베스푸치에게 영광이자 동시에 치욕의 시작이었다. ‘위대한 발견자’에겐 ‘사기꾼’이라는 비난도 꼬리표처럼 따라다닌다.

베스푸치가 남긴 기록에는 그가 1497년부터 1503년에 여러 차례 신대륙에 도착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그 기록을 꼼꼼히 검토한 후세 학자들은 날짜나 거리 같은 중요한 사실에 모순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거짓말쟁이라는 의혹은 이래서 불거졌다.

19세기 미국의 사상가 랠프 에머슨은 “세비야의 피클 장사로 갑판장의 심부름이나 하던 베스푸치가 콜럼버스를 밀어내고 신대륙에 자신의 이름을 남겼다”고 혹평했다. 1999년 4월 뉴욕타임스는 이를 ‘1000년 내 최대 실수(Millenium Mistake)’ 가운데 하나로 꼽았다.

베스푸치가 신대륙에 도착했는지 지금 확인할 길은 없다. 하지만 ‘아메리카’ 명명(命名)건에 대해선 그도 할 말이 있다.

콜럼버스는 죽을 때까지 자신이 발견한 곳이 인도라고 믿었다. 하지만 베스푸치는 그곳이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땅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신대륙에 ‘아메리카’라는 이름을 붙이자고 제창한 것도 베스푸치가 아니라 1507년 독일의 지리학자 마르틴 발트제뮐러였다.

베스푸치의 전기(傳記)를 펴냈던 스테판 츠바이크는 “인류 역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행동 그 자체가 아니라, 그 행동에 대한 인식과 그 행동의 영향”이라고 적었다.

탐욕스러운 장사꾼이자 잔혹한 통치자였던 콜럼버스. 그러나 나이 오십이 다 돼 미지의 세계로 나선 베스푸치는 진정 이상향을 좇는 탐험가였다. 1516년에 나온 토머스 모어의 소설 ‘유토피아’는 베스푸치와 함께 배를 탔던 선원들에게 들은 이야기가 뼈대다. 베스푸치는 ‘지구상 어디엔가 있다는, 개인과 사회가 조화를 이룬 나라’를 유럽인의 가슴에 심어준 셈이다.

이만하면 ‘콜럼비아’보다 ‘아메리카’가 더 나아 보이지 않는가.

홍석민 기자 smh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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