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황호택]‘의회 쿠데타’ ‘사법 쿠데타’

  • 입력 2004년 11월 16일 18시 20분


코멘트
한승헌 변호사가 얼마 전 펴낸 유머 수필집 ‘산민객담(山民客談)’에는 유신치하의 시국사건 재판 이야기가 나온다. 비상보통군법회의 검찰부는 유신헌법 개헌 서명운동을 하다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법정에 선 장준하 백기완씨에게 징역 15년을 구형했다. 구형 바로 다음 날 에누리 없이 징역 15년이 선고됐다. 이 사건 변론을 맡았던 한 변호사는 군법회의가 백화점처럼 한 푼도 깎아 주지 않은 것을 비아냥대 ‘정찰제 판결’이라는 작명을 했다.

민간 법정도 마찬가지였다. 중앙정보부(5공 때는 국가안전기획부)와 검찰 공안부가 사실상 유무죄와 형량을 정했다. 시국사건 법관들은 꼭두각시였다. ‘정찰제’라는 조롱을 듣기 싫었던지 ‘반타작 재판’을 고안해 냈다. 재판부가 검찰 구형량을 절반으로 깎아 선고해 사법부가 독립된 것처럼 가장하는 방법이다.

독재정권일수록 사법부를 꼭두각시 또는 요식절차로 만들어 버리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5공 시절 사법부를 취재하던 기자는 법관들이 정찰제 또는 50% 디스카운트 판결을 해 놓고 부끄러워하며 “사법부와 언론이 독립하는 날이 곧 우리나라에 민주주의가 오는 날입니다”라고 하는 말을 수없이 들었다.

열린우리당 이목희 의원이 수도 이전을 위헌이라고 결정한 헌법재판소를 ‘사법 쿠데타’라고 비난하는 대정부질문을 했다. 이 의원 말대로 헌재 결정이 헌정질서를 유린한 쿠데타에 버금간다면 헌재는 군사반란 세력이란 말인가.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노무현 대통령을 탄핵소추했을 때 열린우리당은 ‘의회 쿠데타’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그 ‘의회 쿠데타’를 헌재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진압했을 때는 ‘사법 쿠데타’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

같은 당 김종률 의원은 헌재의 관습헌법 이론을 히틀러의 나치즘 헌법과 무솔리니의 파시즘 헌법에 빗댔다. 헌재의 독립성을 앞장서 지켜야 할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출신이 지역구 여론만 의식해 이렇게 헌재를 막말로 폄훼해도 되는 것인가.

열린우리당 비공개 의원총회에서는 일부 의원이 선거법 위반으로 한나라당은 13명이 기소된 데 비해 열린우리당은 29명이 기소된 것에 불만을 표시하고 당에서 관심을 표시해야 한다고 발언했다. “우리가 여당답게 보이지 못하니까 사법부가 우습게 여기는 것 아니냐”는 말까지 나왔다고 한다.

여당 의원의 상당수는 유신과 5공 때 정치권력의 지배를 받는 사법부에서 ‘정찰제 판결’이나 ‘반타작 재판’을 받았던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런지 여당 의원들은 일부 헌재 재판관이 독재 권력에 순응한 경력을 거론하며 수구꼴통이라는 비난을 서슴지 않는다. 그들을 재판했던 사법부가 정치권력에 의해 지배됐던 것처럼 그들도 이제 권력을 잡았으니 사법부와 헌재를 장악하고 싶은 것일까.

사법권 독립은 한 나라의 민주화 척도를 재는 바로미터다. 권력을 잡은 쪽에서 헌재 결정이나 사법부 판결이 마음에 안 들더라도 그것을 인정하고 승복하는 것이 민주주의요, 법치국가다. 사법권 독립의 유래를 살펴보면 군주(君主)의 전횡을 막기 위한 제도적 장치로 발전했다. 사법부 재판은 정치바람, 심지어 일반 여론으로부터도 완전히 차단된 무풍지대에서 진행돼야만 공정하고 정의로운 결론이 내려질 수 있다.

황호택 논설위원 hthwang@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