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명화의 비밀'…광학기구가 名畵 만들다

  • 입력 2003년 10월 3일 18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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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 루시다를 이용해 스케치를 하고 있는 저자 데이비드 호크니. 사진제공 한길아트
카메라 루시다를 이용해 스케치를 하고 있는 저자 데이비드 호크니. 사진제공 한길아트
◇명화의 비밀/데이비드 호크니 지음 남경태 옮김/296쪽 6만원 한길아트

우리는 흔히 영감(靈感)의 산물이라는 데 초점을 맞춰 예술작품을 본다. 그러나 예술 창작에서 영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기술적인 표현 능력이다. 영감을 영혼이라고 하고, 기술적인 표현능력을 육체라고 한다면, 예술 감상에서 영감과 기술적인 표현능력을 균형 있게 이해하고 음미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문제는 일반 감상자뿐 아니라 미술사가나 평론가 등 전문가들도 이 기술적인 표현능력의 역할이나 중요성을 간과하곤 한다는 것이다.

영국의 저명한 화가가 쓴 이 책은 미술사 속에서 간과돼온 중요한 기술적 전통 하나를 집요하게 파헤쳐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 역작이다. 책을 읽어가다 보면 오직 기술을 다루는 화가, 그것도 저자처럼 탁월한 표현력을 지닌 미술사적 거장만이 쓸 수 있는 책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독일 화가 한스 홀바인이 1532년에 그린 게오르그 기스체의 초상(위)과 그림의 일부를 확대한 세부도. 탁자 왼쪽에서 편지가 있는 쪽으로 눈을 옮겨가면 탁자가 점점 커지고 동전통이 탁자와는 다른 각도로 놓여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홀바인이 기하학적 원근법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렌즈가 있는 광학기계를 사용해 그림을 그렸다는 증거. 즉 렌즈의 위치가 바뀌면서 화가의 '시점'이 어긋났다는 뜻이다.

저자가 파헤친 서양회화의 중요한 기술적 전통은 바로 광학(光學)과 관련된 것이다. 광학은 원근법, 해부학과 더불어 서양회화의 중요한 기술적 진보를 이뤄낸 학문이다. 하지만 후자들에 비해 그 실체적 역할에 대한 이해가 지금까지도 상당히 부족한 편이다. 저자는 그 이유로 두 가지를 든다. 하나는 옛 장인들의 핵심 기술이 그렇듯 광학에 기초한 표현 또한 화가마다 일종의 비밀스러운 기술로 가급적 외부 노출이 제한됐다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비사실적인 회화가 난무하게 된 현대에 들어 광학과 관련된 도구 사용법과 지식의 전승이 단절됐다는 점이다.

이 책에 따르면, 유럽 회화사에서 광학 표현이 본격적으로 활용되기 시작한 것은 1430년대 플랑드르에서부터다. 이때부터 광학에 기초한 회화 표현은 거울-렌즈, 카메라 오브스쿠라, 카메라 루시다 등의 도구적 발달에 힘입어 밀도 있게 전개된다. 이들 도구와 기술이 사진기의 발명과 직접적으로 이어지는 것이고, 그 기본적인 원리는 빛을 모아 우리 눈이나 화포에 이미지를 투영하는 것이라는 사실만큼은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 책은 이런 광학 기술이 응용되기 시작하면서 서양에서는 복잡한 원근법이나 해부학적 지식보다 광학에 의지해 그림을 그리는 현상이 훨씬 두드러지게 나타났다고 본다. 사람이든 정물이든 대상의 실제 이미지를 화포에 투영해 놓고(환등기로 사진 이미지를 흰 천 위에 쏜 것을 연상하면 된다) 그대로 따라 그리면 쉽고 빠르게, 그리고 매우 사실적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것. 때문에 구태여 모델을 눈으로 직접 보고 측량하면서(이를 저자는 ‘눈 굴리기’라고 부른다) 고생스럽게 그릴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대부분의 명화가 이런 식으로 그려졌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물론 이런 기술도 고도의 표현을 위해서는 남다른 재능과 훈련이 필수적으로 요구됐다는 점을 빼놓지 않았다.

이 책에서 무엇보다 재미있는 부분은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누구의 어떤 그림에 어떤 방식으로 광학 기술이 사용됐는지 호크니가 하나하나 파헤쳐 보이는 장면이다. 그의 경악스러울 만큼 날카로운 눈썰미는 보는 이의 경탄을 자아낸다. 수백 년의 역사가 남긴 퍼즐을 완벽하게 맞춘 것 같다고나 할까, 그림 보는 묘미를 선사하는 책이다.

이주헌 학고재화랑 관장

▼화가들이 사용했던 광학 기구들▼

∇카메라 오브스쿠라=어둠상자로도 불리는 카메라 오브스쿠라는 자연 현상에서 발견한 것으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어두운 방(또는 상자)의 벽에 작은 구멍을 뚫어놓으면 구멍을 통해 투사된 빛은 반대편 벽면에 사물의 역전된 상을 그림으로 남긴다. 이 원리를 처음 발견한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로 알려졌다. 18세기에는 이 기구가 붐을 이루기도 했다.

∇카메라 루시다=1806년 광학자이자 물리학자인 윌리엄 하이드 울러스턴이 발명한 도구. 프리즘에 135도 각도의 반사면 2개를 설치한 장치. 관찰자는 접안 구멍으로 사물을 보는 동시에 프리즘을 통해 비추어지는 종이와 연필의 끝도 볼 수 있다. 구멍을 통해 사물을 보면서 그 윤곽을 따라 종이에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도와준다. 제대로 이용하려면 상당한 숙련이 필요한 장치.

주성원기자 sw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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