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최영묵/빈곤의 대물림

  • 입력 2003년 9월 14일 18시 4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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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추석엔 명절 ‘단골메뉴’인 정치판 얘기도 시들했다. 태풍 ‘매미’가 삶의 터전을 휩쓸고 가 총선이고, 신당이고 입에 올릴 겨를조차 없었다.

명절 때면 으레 이런저런 사건사고가 이어졌지만 올해는 뉴스도 태풍 뿐이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14일자 신문 사회면 한구석에 자리 잡은 일가족 동반자살 기사가 눈길을 끌었다. 1억원이 넘는 빚을 지고 개인파산선고를 받은 가장이 가족을 태운 채 강물로 차를 몬 안타까운 사건이었다.

연휴 기간 귀성 또는 귀경길에서 태풍만큼이나 자주 화제에 오른 것이 ‘먹고 사는 문제’가 아니었나 싶다.

언제부터인가 신문지면에서도 ‘빈곤’이나 ‘빈부격차’ 관련기사가 차지하는 비중이 커지고 있다. 일가족 동반자살 소식이 하루가 멀다 하고 들린다. 두 가족이 동시에 목숨을 끊은 날도 있었다.

얼마 전 TV에서는 비 때문에 올 여름 내내 날품을 팔지 못한 일용직 근로자가 “저주받은 나라…” 운운하는 장면도 나왔다.

미래 세대에 드리워진 그림자는 더 큰 문제다. 교육인적자원부 자료에 따르면 올해 목숨을 끊은 초등학생 중 40%는 가난이 그 원인이라고 한다.

한 사회복지단체 관계자가 전해준 사연.

“김모군(18)은 고교 3학년생으로 수능시험을 눈앞에 두고 있다. 병상의 할아버지(77)를 모시고 월세 15만원짜리 단칸방에 사는 소년가장이다. 할아버지를 수발하느라 아침은 굶지만, 점심 저녁은 그나마 학교에서 때워 다행이다. 심성도 바르고 공부도 잘해 정말로 도와주고 싶지만 뾰족한 수가 없다. 할아버지는 돌아가시겠다고 수면제를 사서 모으면서도 손자 때문에 쉽게 죽지도 못한다며 한숨만 짓고 계신다.”

비슷한 사례들은 수없이 많다. 이런 빈곤의 대물림이 사회구조화되고 있다는 진단은 이미 구문이 돼버렸다.

무엇 때문인가. 그들의 책임을 논할 수도 있겠지만, 특정지역 아파트 값이 한 달 새 1억원이나 오르는 현실에서 당사자들의 능력을 따지는 것이 온당한지 의문이다. 아무리 성실하게 일해도 뒤처지기만 하는 사람들의 ‘상대적 박탈감’을 우리가 얼마나 이해하고, 함께 서려고 노력했는지 되돌아볼 일이다.

나라 밖 사정도 좋지 않다.

60여개 국제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세계화 국제포럼’이 지난해 펴낸 자료에 따르면 10억달러 이상을 가진 전 세계 거부 475명의 재산이 세계 인구 하위 절반의 소득을 모두 합친 것보다 많다. 이런 추세는 세계화의 불가피한 귀결로, 더욱 빠르게 진행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우리도 그 영향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이런 판에 우리 사회의 지도층은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가.

대책을 숙의해야 하는 국회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기억이 희미해진 지 오래다. 더욱이 집권세력은 ‘신당놀음’에 날 새는 줄 모르고 있다.

물론 빈곤이 하루아침에 극복될 수 있는 과제는 아니다. 수혜 성격의 일방적 복지정책이 근본적인 해법일 수도 없다. 하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그만큼 장기적인 계획을 수립해 착실하게 추진해야 한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정치개혁도, 보혁논쟁도, 그리고 국민소득 2만달러도 다 중요한 일이지만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강건너 불’이며 ‘그림의 떡’이다. 우리 모두가 한 공동체에 살고 있다는 최소한의 인식을 그들에게 심어주지 못하면 언젠가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도 막지 못하는 혼란이 올지도 모른다.

빈곤과 빈부격차의 심각성을 직시하고 관심을 갖는 것이 이를 막을 수 있는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최영묵 사회1부 차장 ymoo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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