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모항 막걸리집의 안주는 사람 씹는 맛이제'

  • 입력 2003년 8월 15일 17시 4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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텁텁한 농주 한 사발에 꼬인 속내를 푸는 전북 부안군 변산 모항 마을 사람들. 그들의 이야기 속에서 ‘징헌’ 인생살이의 가락이 출렁출렁 흘러나온다.사진제공 디새집
텁텁한 농주 한 사발에 꼬인 속내를 푸는 전북 부안군 변산 모항 마을 사람들. 그들의 이야기 속에서 ‘징헌’ 인생살이의 가락이 출렁출렁 흘러나온다.사진제공 디새집
◇모항 막걸리집의 안주는 사람 씹는 맛이제/박형진 지음/211쪽 8000원 디새집

변산의 시인 박형진은 자기 고향 사람들을 어쩌면 이토록 사랑할 수 있을까. 고향이 있기는 하되 고향 사람들이 어떻게 애면글면 살아왔는지 거의 모르며 살아온 나로서는 그저 놀랍고 부끄럽기만 하다. 그는 고향사람들의 기쁘거나 고통스러운 숨소리까지 은근히 가슴속에 보석처럼 간직했다가 원석 그대로 산문이라는 형태로 우리들의 손에 고요히 쥐어주었다.

나는 그의 글을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내내 입가에 벙그레 번지는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물론 그가 선사한 웃음은 단순한 웃음이 아니다. 눈물과 통곡이 배어 있는 신성한 웃음이다. 갑열이 삼대가 덕재(병어)라는 고기를 잡다가 한꺼번에 바다에서 죽은 이야기와, 약간 정신이 나간 고막녀의 이야기는 슬프다. 그러나 왠지 처참하지는 않다. 고막녀가 두 남자를 보고 ‘아버지가 다른 아이’를 둘씩이나 낳아도 끝내 제대로 살지 못하는 이야기 또한 슬프지만 단순히 비극적이지만은 않다. 나도 모르게 뜨뜻한 미소가 가슴께로 번진다.

어디 그뿐인가. 눈을 끔쩍이면서 자꾸 뒤돌아보는 바람에 혼자 사는 과부가 꼬리치는 게 아닌가 싶어 줄포장에서부터 줄곧 남자를 뒤따라오게 한 ‘눈끔쩍이’ 이야기, 뱃머리 나침반 속에 들어 있는 알코올까지 빼서 술 대신 마신 기열씨 이야기, 닭똥집 좋아하는 군수를 대접하면서 정작 닭똥집은 자기가 먹어버려 좌천당한 박 면장님 이야기, 새참 대신 콜라와 빵을 먹다가 콜라에 맛을 들여 목이 마르면 소 세워놓고 둑에 앉아서 간장국 가져오라고 고함지른 영만씨 이야기, 밭을 갈다가 뱀을 잡으면 소에게 더할 나위 없는 보약이라면서 풀에 돌돌 말아 소 아가리에 뱀을 밀어넣어 삼키게 한 내문씨 이야기, “올 때 주었는디 갈 때 뭔 놈의 차비를 또 달란디야?” 하면서 끝내 차비를 주지 않은 오 처녀 이야기 등 빙그레 웃음을 머금게 하는 이야기가 한둘이 아니다.

그의 글을 읽다 보면 마치 나 자신이 오랫동안 그들과 함께 농사를 짓고 고기를 잡으면서 변산 앞바다에서 살아온 듯하고, 감칠맛 나는 전라도 사투리로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지금 막 막걸리 사발을 손에 들고 있는 듯하다.

“오사 잡놈들 다 가버링게 잡년들도 다 가부렀어. 시방 어디 있가니? 그런 사람들….”

폐항이 된 곰소항에서 아직도 술을 팔고 있는 늙은 주모의 전라도 말 품새를 어쩌면 이토록 생생하고 정감 어리게 나타낼 수 있을까.

그의 글은 밭에서 금방 딴 풋고추를 찬 물에 헹구어 막된장에 찍어먹는 맛이다. 그러다가 매운 놈을 하나 만나 눈물이 찔끔 나도록 혀를 훼훼 휘두를 정도로 맛있는 글이다. 도대체 그의 글은 어디를 둘러봐도 꾸밈이 없다. 화려한 형용사와 넘치는 부사의 장식이 없다. 있는 그대로, 살아온 형국 그대로를 숨김없이 보여주면서 ‘자, 보세요, 이게 사람 사는 진정한 모습입니다’ 하고 나직이 속삭인다. 마치 까무잡잡하게 해풍에 그을은 한 소년이 서울서 사는 데 지쳐버린 나 같은 중년의 사내를 맑게 쳐다보고 환하게 웃고 있는 듯해서 나는 그의 글이 좋다.

그렇다. 그의 글에는 도시민이 도저히 다가갈 수 없는 신성함이 배어 있다. 자연이 지닌 순수성과 그 자연 속에서 순응하며 살아가는 이들의 천진함과 성실함이 숨어 있다. 지하철을 타기만 하면 어김없이 꾸벅꾸벅 졸거나, 높은 빌딩 사이로 허겁지겁 바쁘게 걸어다니는 도시민들은 이 글을 한 번쯤 고요히 읽어 잃어버린 자신의 고향을 되찾게 되길 바란다.

박 시인은 ‘작가의 말’에서 ‘정말로 잘 산다는 것, 행복하게 잘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하고 묻고 있다. 그는 이제 자신에게 그런 질문을 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그는 자연과 하나가 되어 욕심내지 않고 정말 제대로 잘 살고 있는 듯하다. 나는 그런 그가 부럽다. 그가 지닌 자연에 대한 소박함과 행복함을 조금쯤은 훔치고 싶다. 언젠가 그를 만나면 그가 직접 산 밑의 밭 한 귀퉁이에다 3년 걸려 지은 흙벽돌집에서 보리새우양념젓에 상추쌈을 싸서 먹는 점심을 한 끼 얻어먹고 싶다. 모항 막걸리가 곁들여지면 더욱 좋겠다.

정호승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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