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에 만나는 시]'이성복' 아, 입이 없는 것들

  • 입력 2003년 7월 4일 17시 2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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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입이 없는 것들 (이성복)

저 꽃들은 회음부로 앉아서

스치는 잿빛 새의 그림자에도

어두워진다

살아가는 징역의 슬픔으로

가득한 것들

나는 꽃나무 앞으로 조용히 걸어나간다

소금밭을 종종걸음치는 갈매기의 발이

이렇게 따가울 것이다

아, 입이 없는 것들

■시집 ‘아, 입이 없는 것들’(문학과지성사) 중에서

꽃들의 회음부가 인식되는 순간, 식물인 꽃에는 그 꽃을 투사하는 인간의 동물성이 이입된다. 또한 그 순간, 꽃을 인식하는 주체인 인간에게는 식물의 삶이 이입되어 꽃과 인간의 삶이 다르지 않다. 둘은 “살아가는 징역의 슬픔으로 가득한” 그 무엇이 되는 것이다. 수많은 시에서 식물의 이미지가 넘쳐나고, 돌과 산의 이미지가 차용되며, 욕정으로 몸을 뒤트는 붉은 꽃이 등장할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 시는, 도도히 흘러가는 가쁜 물살에 묻혔다 나타났다 하는 징검다리처럼 내게로 다가온다. 징검다리처럼 듬성듬성 놓여 있는 시어들 탓이다. 세상에는 수많은 강이 있고, 다양한 공법으로 지은 아름다운 다리도 있지만, 지금 이 순간 나는 그가 놓은 징검다리를 건너가고 싶은 위험한 충동을 느낀다. 강 저편에서 지금보다 더한 “살아가는 징역”과 대면하게 된다 해도.

그의 시는 욕망으로 뻗은 현실 속 거대한 다리처럼 엄청난 것들을 우리에게 제시하진 않지만, 우리가 둔감함으로써 강 저편에 있는 것과 다름없는 삶을 깨닫게 한다. 그의 새 시집을 채우고 있는 시들은 거대한 구조물 위에서 안전하게 난간에 몸을 기대고 눈 아래로 풍경을 관망하는 시점으로 쓰여 있지 않다. 자신이 직접 환경의 구성원이 되어 얽혀 들어가야만 이해가 가능한 관점으로 쓰여 있다.

그의 감각 안으로 들어와 소금밭을 종종걸음치는 갈매기의 발은 따가울 것이다. 삶을 징역처럼 받아들이는 그도 “꽃나무 앞으로 조용히 걸어나간다”. 그의 그림자가 꽃의 어둠에 더께를 더할지도, 꽃나무가 그의 감옥에 철창 같은 그림자를 덧씌울지도 모른 채.

이 세상에는 제 아픔이나 고통을 느끼지도 못하는 존재들이 있다. 절절히 느끼되 고통을 말할 줄 모르는 존재들도 있다. 고통의 발설 자체를 무의미하게 여기는 존재들도, 고통을 기호로만 나타내는 존재들도 있다. 그래서 그는 탄식한다. 아, 입이 없는 것들!

조 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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