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인권, 그 위선의 역사'…인권전도사들의 두얼굴

  • 입력 2003년 5월 30일 17시 1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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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 그 위선의 역사/커스틴 셀라스 지음 오승훈 옮김/459쪽 1만4000원 은행나무

우리는 유엔과 유엔인권위원회 그리고 인권선언의 탄생으로 인류의 ‘삶의 질’이 개선됐다며 자위한다. 뉘른베르크와 도쿄의 전범재판은 나치와 일본 군국주의의 피해자들에게 보복의 카타르시스를 제공했고 이를 통해 전쟁 없는 전후 50년의 세계질서가 수립될 수 있었다고 믿는다. 인권운동가들은 엘리너 루스벨트 여사를 인권운동의 대모로 추앙하며 그를 본받아 인류애의 증진에 헌신한다. 또한 앰네스티가 각국의 인권 신장에 공헌하고 노벨평화상 수상자 카터는 인권과 평화라는 보편적 이념이 충분히 가치 있는 것임을 설득하는 데 이바지했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이런 자위와 카타르시스, 평화의 수사에 현혹되지 말라고 경고한다. 나아가 인권운동가와 단체들 그리고 인권을 표방한 정책 등이 수단으로 전락하는 현실을 고발한다. 저자의 추적에 따르면 인권위원회와 인권선언은 미국이라는 강대국의 불순한 정치적 의도의 산물이며, 두 차례의 전범재판은 ‘승자의 정의’를 강요한 희대의 정치쇼다. 루스벨트 여사는 인권보다는 미국의 국익 신장에 기여한 냉전의 투사였고 앰네스티는 자신들의 추악한 식민사를 은폐하고 일방적 가치를 강요하는 영국인들의 집단이다. 또 카터는 정권 획득의 수단과 침체된 미국의 돌파구를 ‘인권’에서 찾고 그런 미명하에 제3세계 국가들의 주권을 짓밟은 미국인이다. 당연한 논리적 귀결로 저자는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 어찌 ‘해방전쟁’이냐고 반문한다.

이 책은 피 묻은 손이나 간사한 혀로 더럽힐 수 없을 만큼 숭고한 보편적 이념이 현실의 정치와 야합해 가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현대 국제정치사를 비판적 관점에서 서술했다. 사실 저자는 ‘인권’ 이념의 탄생 과정에서의 동기의 순수성 자체를 의심하고 있다. 정치인이라면 이 책을 읽고 너무나 당연한 정치적 논리와 현실을 한 권의 책으로까지 써낸 데 대해 의아해 하면서도 경의는 표할 것이고, 아직도 순수한 열정으로 가득 찬 시민운동가라면 그런 순수성을 폄하하는 저자의 냉소적 태도에 경악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저자의 의도를 의심할 것이다. 정치의 무대 뒤를 관찰할 수 있는 저널리스트나 매일매일 신문의 정치면을 통해서 한국정치를 들여다볼 만큼 정치에 관심도 있고 또 스스로 필력이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이라면 ‘개혁, 그 위선의 역사’라는 제명의 한국현대정치사를 써보고 싶은 생각이 들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독자들이 공통적으로 내리는 독후감의 결론은 “그래서 결국 뭘 어떻게 하자는 거냐?”하는 비아냥거림이 섞인 의문문이 될 공산이 크다. 이 책은 버려진 진실과 숨겨진 사실을 시시콜콜하게 적시하면서 책장을 넘길 때마다 추리소설을 읽을 때처럼 독자가 감탄하게 하거나 적어도 수긍하게 하는 매력을 지니고 있다. 그렇지만 인권과 국가주권이 충돌하고 그럴듯한 구호와 정치적인 음모가 뒤엉킨 국제사회의 교통정리 방법에는 침묵한다. 인용된 유엔에 대한 평가 즉 “많은 공을 들여 만든 휴지통”의 운명을 답습하지 않으려면 어느 정도의 철학적 고민을 가미해야 할 것이다. 다행히 역자후기가 이 한계를 약간은 보완하고 있고 친절한 역자주도 독자층의 범위를 넓히는 데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이웅현 고려대 평화연구소 연구교수·국제정치zvezda@korea.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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