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처음 만나던 때'…“가끔씩 初心으로 되돌아가자”

  • 입력 2003년 5월 16일 17시 39분


코멘트
김광규의 시는 쉬운 언어 속에 생활의 체험을 담고 있다. 그에게 시는 ‘새처럼 나는 것’이다. 안철민기자 acm@donga.com
김광규의 시는 쉬운 언어 속에 생활의 체험을 담고 있다. 그에게 시는 ‘새처럼 나는 것’이다. 안철민기자 acm@donga.com
◇처음 만나던 때/김광규 지음/136쪽 5000원 문학과지성사

인터뷰를 요청하자 김광규 시인(62·한양대 독문과 교수)은 오전 일찍 만났으면 좋겠다고 했다. “아침 나절에 맑은 정신으로 또박또박 써 내려간 것이 바로 김광규의 시편들”이라는 어느 평론가가 이야기했듯이 ‘아침’이 갖는 명징한 이미지는 그와 썩 잘 어울린다.

여덟 번째 시집 ‘처음 만나던 때’에는 그가 이순(耳順) 전후에 썼던 72편의 시가 담겨 있다. 그는 시간의 순환 속에서 언제나 원점을 그리워하면서도 자꾸 멀어져 가는 동심원을 그려왔다(시인의 말)고 털어놓는다. ‘처음 만나던 때’는 ‘글을 쓴다’는 삶의 구심점으로 다가가려는 몸부림이다.

“맨 처음 시를 쓸 때, 긴장과 어려움, 순수함이 있었죠….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어떤가요. 첫 대면에서는 경어로 말을 걸고, 다음에는 이름을 부르고, 말을 놓고, 후에는 욕설을 섞어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가까워진다고 여기지만 오히려 멀어지는 것이 아닌가, 나도 그렇게 살아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 앞으로만 달려가면서/ 뒤돌아볼 줄 모른다면/ 구태여 인간일 필요가 없습니다/ … 서먹서먹하게 다가가/ 경어로 말을 걸었던 때로/ 처음 만나던 때로/ 우리는 가끔씩 되돌아가야 합니다’ (처음 만나던 때)

경어로 말을 거는 것은 초심(初心)을 그리워하는 시인의 마음이다. 이번 시집에는 경어체로 쓴 시가 여러 편 실렸다.

이순을 지나온 시인은 ‘죽음’에 자연스럽게 관심이 가는 모양이다.

‘낡은 혁대가 끊어졌다/ 파충류 무늬가 박힌 가죽 허리띠/ 아버지의 유품을 오랫동안 몸에 지니고 다녔던 셈이다/ 스무 해 남짓 나의 허리를 버텨준 끈/ 행여 바람에 날려가지 않도록/ 물에 빠지거나/ 땅에 스며들지 않도록/ 그리고 고속도로에서 중앙선을 침범하지 않도록/ 붙들어주던 끈이 사라진 것이다/ 이제 나의 허리띠를 남겨야 할/ 차례가 가까이 왔는가/ 앙증스럽게 작은 손이 옹알거리면서/ 끈 자락을 만지작거린다’ (끈)

암 진단을 받은 동료를 언급한 ‘하루 또 하루’를 비롯해 ‘남은 자의 몫’ ‘미룰 수 없는 시간’ 등에서 그는 죽음 그 너머를 바라본다.

“부모 선배들에 치고 있던 장막이 걷혀졌다고 할까요. 이제 알겠어요. 내 속에서 죽음이 자라고 있다는 것을, 생(生)의 대척점에 죽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생 속에 포함돼 있다는 것을 말이죠.”

이미 널리 알려진 대로 그의 시는 현란하거나 난해하지 않다. 관념의 겉옷은 없다. 평범한 일상은 투명하게 읽히고, 삶의 한가운데서 떠날 줄 모르는 시선은 웅숭깊다.

35세, 문학관(文學觀)이 서 있는 나이에 등단한 까닭에 어떠한 주변의 평가에도 주저함이 없었다고 그는 말했다. 난해한 시가 넘쳐나는 가운데 누구는 역설적으로 그의 시를 ‘혁명적’이라고 했고, 또 다른 누구는 “이건 시가 아니다”라고 했다. 독자가 시를 읽고 무엇이든 알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은 그에게 지금껏 유효하다. “관념이나 추상을 덧입고 시인인 체하는 것이 싫다”며 그는 웃었다.

조이영기자 lycho@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