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역주 매씨서평'

  • 입력 2003년 1월 10일 18시 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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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주 매씨서평(譯註 梅氏書平)

정약용 지음/이지형 역주/1053쪽/6만원/문학과지성사

조선후기 실학의 집대성자라고 일컬어지는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1762∼1836)의 글을 읽다 보면 정말로 짜증이 난다. 자신의 주장을 펼치기 위해 끌어대는 고금의 수많은 자료들은 따라가며 훑어보기만 해도 기가 질릴 뿐 아니라 다양한 인용문에서 수시로 등장하는 생소한 한자들로 인해 끊임없이 사전을 뒤져야 한다.

대표적 실학자로 손꼽히는 북학파의 박지원은 비판적 시각으로 현실을 직시하며 자신의 사상을 자유로운 문체에 담아 펼쳤고, 최한기는 서양 근대과학과 성리학을 결합한 자신의 사상을 체계적인 독립 저작을 통해 드러냈다. 이들이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형식의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펼친 데 반해 정약용은 ‘경학(經學)’이라는 전통적 학문방법에 누구보다도 충실하며 전통학문의 기초 위에 자신의 사상을 쌓았다.

‘경학’이란 유학의 고전에 주석을 달며 고전의 사상을 재해석하는 학문이다. 이 과정을 통해 고전을 기반으로 새로운 사상을 펼치는 것이다. 정약용의 대표적 저작으로 평가되는 일표이서(一表二書), 즉 ‘경세유표(經世遺表)’ ‘목민심서(牧民心書)’ ‘흠흠신서(欽欽新書)’가 그의 경세론을 담은 저작이라면, ‘춘추고징(春秋考徵)’ ‘논어고금주(論語古今注)’ ‘맹자요의(孟子要義)’ 등은 그의 경학을 담은 것이다. ‘매씨서평’은 그의 방대한 경학 저작 중에서도 그의 박식하고 치밀한 고증학적 역량을 잘 보여주는 책이다.

이 책은 ‘상서(尙書)’의 58편 중 동진(東晉) 사람인 매색(梅/)이 발견했다고 하는 25편이 위작임을 고증한 것이다. 사실 매씨의 상서가 위작이라는 의문은 이미 여러 차례 제기돼 왔었다. 송대의 주희, 원대의 오징, 명대의 매작 등 많은 학자들이 매씨상서의 위작 가능성을 지적했다.

정약용도 이들의 글을 통해 매씨상서가 위작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가 이에 대해 본격적인 저작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은 청대 학자인 모기령(毛奇齡·1623∼1716)의 ‘고문상서원사(古文尙書T詞)’를 읽으면서부터였다.

모기령은 청대 고증학에서 대단히 중요한 학자로 학식도 뛰어난 사람이었으나 특이한 설을 내세워 타인을 공박하기를 좋아했다. 정약용은 매씨상서를 옹호하는 그의 주장을 보며 그를 논박하기로 작정한 것이다.

모기령이라는 청대 최고 수준의 고증학자와 맞서기로 한 것은 정약용의 학문적 야심을 엿볼 수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매씨서평’을 보면 고증학자로서 정약용의 학문적 수준이 이미 그런 욕심을 내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매씨가 발견했다는 25편에 사용된 용어, 인용문 등을 하나하나 검증하며 이것이 후대의 위작임을 증명했다. 모기령 자신의 글뿐 아니라 매씨상서에 대해 긍정적으로 일관한 학자들을 반박하고 유가의 경전, 제자서(諸子書), 역대 사서(史書), ‘주자어류(朱子語類)’, ‘서찬언(書纂言)’, ‘상서고이(尙書考異)’, ‘고신록(考信錄)’, ‘상서고문소증(尙書古文疏證)’ 등 방대한 자료를 동원해 25편을 하나씩 논박했다.

정약용의 치밀한 학문 태도와 함께 다산 경학 전문가인 역주자(성균관대 명예교수)의 꼼꼼한 역주에서도 배울 점이 많다.

김형찬기자·철학박사 kh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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