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최일남/새 달력을 벽에 걸며

  • 입력 2002년 12월 31일 17시 13분


‘창작과 비평사’에서 선물받은 ‘2003 유홍준의 문화유산 달력’ 첫 장은 강원 강릉시 강문동의 ‘진똘배기’ 사진이다. 높은 장대 위에 새를 장식한 솟대를 그 지역에서는 진똘배기라고 한다는 설명이 재미있다. 길쭉하게 꾸민 달력 모양과 더불어 눈이 대뜸 시원하다. 이 맛이야! 싶다. 새 달력을 벽에 거는 순간 찾아드는 잔잔한 떨림이 웬만큼 먹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해마다 싫지 않다. 그것은 자괴인가 희망인가.

▼당선자에 쏟아진 갖가지 주문▼

얼마 전까지만 해도 16대 대선에서 변방으로 밀린 예순 안팎, 또는 그 이상의 단풍 세대가 망년술에 조금씩 취한 걸음으로 유명 화가들의 풍경화가 담긴 호화 달력을 손에 돌돌 말아 저문 날의 귀가를 서둘던 생각이 난다. 그보다 훨씬 전에는 국회의원들이 나눠준 한 장짜리 달력이 시골 농가라든가 허름한 음식점 벽면을 장식했다. 무궁화로 테를 두른 선량들의 해낙낙한 얼굴이 복판에 끼어 ‘근하신년’처럼 웃고 있었다.

캘린더 하나를 갖고도 그때그때 다른 시대의 반영을 읽을망정 신년벽두에 앉아 새 달력을 바라보는 마음은 매번 유다르다. 사사로운 감정이야 결국 덤덤하되, 함께 가는 세상 일에마저 등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금년은 더구나 대통령이 바뀐 해다. 대통령당선자에 대한 갖가지 주문이 그래서 이미 왕창 나왔다. 이런저런 기대와 권고가 예서 제서 하루가 멀다 하고 줄줄이 쏟아지고 있다. 통틀어 상식이 통하는 사회를 만들어 달라는 이야기로 그 많은 제언을 요약할 수 있다.

노무현 대통령당선자도 지금은 이런 지적에 일일이 귀를 기울여야 할 때려니와, 한편으로는 기분이 좀 쓸쓸하다. 말을 바꾸면 그만한 수준의 당연한 지적조차 먹히지 않는 사회를 살아왔다는 증거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반세기가 지나도록 상식 타령을 아직껏 복창해야 하는 나라의 새 대통령으로서, 노 당선자는 기필코 그걸 해내리라는 희망을 그리고 갖는다. 돈 없고 조직 없이 오른 자리에 서서, 돈 안 들이고 할 수 있는 일을 왜 못해. 상식이 통하는 길로 가기 위한 디딤돌이 열이라면, 적어도 일여덟은 놓고 자리를 떠나도 떠나는 과단(果斷)을 기다린다. 왔다 갔다 철새 의원을 붙박이새로 놔두지 않는 용단 또한 필요하다.

하긴 이래라저래라 주장하는 인사의 면모도 여러 가지다. 제왕은커녕 ‘왕제왕’으로 살벌했던 박통 전통 시절엔 입도 뻥긋 않고 눈조차 흘기지 않던 사람인들 없으랴. 이제는 돌아와 편한 소리를 편하게 하는 선선한 모습이 민망하다. 나 같은 필생(筆生)을 포함한, 기회주의 성품을 더 들먹이고픈 오늘은, 그러나 아, 설날이다.

가장 큰 과제로 떠오른 지역감정과 세대 갈등 해소가 무엇보다 급하다. 국민통합을 명제로 두 현안을 동시에 아우르거늘, 또다시 재현된 동서 분할은 일이 너무 거창하여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 할지 감감하다. 답안은 이미 나와 있는데 속내가 하도 복잡하고 예민하여 엄두를 못 내거나, 피리 소리를 따라가지 못하는 신명이 어느 세월에나 불을 지필지, 아직은 절통한 시간이다.

하지만 보자. 전에는 영남사람 영남후보 찍고, 호남사람 호남후보 찍었을망정 이참에는 양쪽이 타향 출신으로 기울었다. 괜찮은 싹수로 여겨 잘 키워간들 어떠리. 노 당선자의 호남 득표율이 압도적이었다지만 민주당 5년의 저런 실정에 뒤따르는, 우세스러운 낙망의 다른 표현이다. 자존 회복의 참담한 안간힘이다. 광주의 국민경선이 벌써 그랬다. 대선과 같이 치른 전북 장수군의 군수 보궐선거에서 민주당 후보가 28.2%의 득표로 낙선한 예도 같은 맥락이다.

▼´상식 통하는 사회´ 이뤄질까▼

2030대와 5060대의 상반된 의식을 반드시 갈등으로 양단할 건 또 뭐 있나. 어느 세상에나 있는 순수 지향 의지의 한 보기요, 한국적 역동성의 믿음을 담보한다. 지역을 따지지 않고 동서남북으로 흩어져 자기 생각에 충실했다. 개혁 기미가 전혀 없는 언론, 특히 메이저 언론사의 긴장 반성을 오히려 촉구한 셈이다. 마침내 그들도 연만해지기 마련인 걸 지금 당당하지 않으면 언제 당당하겠는가.

최근에 사 본 피천득 선생의 책 ‘어린 벗에게’ 머리글에서 설날 아침에 어울림직한 대목을 마침 읽는다.

“사람이 나이가 들수록 어린이와 똑같아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참으로 진실입니다.”

최일남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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