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차수/북핵, 1994년과 2002년

  • 입력 2002년 12월 25일 19시 14분


1993∼94년의 1차 북한 핵위기 때와 최근 다시 불거진 2차 핵위기에 대한 국민들의 반응이 판이하다.

북한이 핵시설에 대한 봉인과 감시장치를 모두 제거한 24일. 수많은 인파가 성탄전야를 즐기기 위해 쏟아져 나왔지만 여느 해와 마찬가지로 평온했다. 북한 핵문제에 대해 신경을 쓰는 사람들은 거의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미국은 즉각 이라크와 북한에서 동시에 전쟁을 수행할 능력이 있다고 경고하고 나섰다.

북한이 국제원자력기구(IAEA) 탈퇴를 선언했던 1994년 6월14일 상황은 전혀 달랐다. 라면 쌀 생수 같은 생필품을 사재기하려는 발길이 곳곳에서 이어졌다. 대북 제재 논의가 본격화하자 외국 언론들은 서울에 전쟁특별취재팀을 파견했고 국민들은 전쟁 발발 위험에 떨었다. 북한이 핵개발 비밀계획을 시인한 데 이어 제네바합의에 따라 동결된 핵시설 봉인 제거로 증폭된 이번 핵위기는 1차 핵위기에 비해 훨씬 심각한 수준이다. 북한이 마음만 먹으면 곧바로 핵무기 제조에 필요한 플루토늄 추출에 돌입할 수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도 1차 핵위기 때 안보과민증 반응을 보였던 국민들이 이번에는 전혀 동요하지 않고 있다. 국민 의식이 성숙한 것이라면 다행이지만 안보불감증에 빠진 것 같다.

왜 이렇게 변했을까. 우선 정부의 태도가 바뀌었다. 1차 핵위기 당시 김영삼(金泳三) 정부는 북한 핵문제의 남북 당사자 해결원칙을 고수하려 애썼다. 북한의 남북대화 거부로 어쩔 수 없이 북-미 고위급회담을 양해했지만 김영삼 대통령은 기회 있을 때마다 “우리 어깨 너머로 협상이 진행돼선 안 된다”고 제동을 걸었다.

그러나 김대중(金大中) 정부는 북한 핵문제는 북-미간에 해결해야 할 문제로 여기고 있다. 우리가 직접 나서서 해결할 사안이 아니므로 북-미 대화를 ‘중재’하겠다는 태도다. 노무현(盧武鉉) 대통령당선자의 입장도 비슷하다.

정부의 태도가 바뀌면서 국민들의 의식도 변했다. 1차 핵위기 때 많은 국민들은 북한 핵무기의 1차 표적은 남한이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전쟁 불안에 떨면서 사재기에 나선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대다수 국민들은 북한 핵문제를 남의 집 불 보듯 하고 있다. 북한의 핵동결 해제와 핵무장 시도를 대미 협상을 겨냥한 벼랑끝 전술로만 받아들이고 있다. 게다가 북한이 핵무기를 보유하면 통일 후 우리 것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까지 있다.

이런 변화에는 햇볕정책도 한몫 했다. 서해교전에도 불구하고 금강산 관광객이 계속 북한을 찾는 모습을 보고 설마 북한이 남한에 핵 공격을 하겠느냐는 생각을 은연중에 갖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런 단순한 생각은 위험하다. 북한이 핵무장을 하면 남한이 볼모가 될 수밖에 없고 남북관계가 악화돼 전쟁이 일어난다면 결국 핵 공격 대상이 된다. 게다가 미국은 북한의 핵무장 저지를 위해 무력을 동원할지도 모른다. 미국은 94년 여름에도 우리 정부와 사전 상의없이 영변 핵시설 폭격계획을 세운 뒤 실행하려다 중단한 바 있다. 미국은 북폭에 대비해 주한 미대사관 직원가족들을 본국으로 송환했었다.

우리 스스로 안보를 책임지지 못할 경우 현실은 이처럼 냉혹하다. 정권 이양기에 다시 터진 북한의 핵도박에 우리의 명운이 걸려 있다. 냉엄한 현실을 직시해야 할 때다.

김차수 정치부 차장 kimc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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