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고승철/'철밥통' 누가 깰것인가

  • 입력 2002년 11월 17일 19시 50분


프랑스 파리에서 10여년 전에 있었던 일이다. 한국 대통령이 프랑스를 방문했다. 그곳에서 근무하는 어느 한국 외교관은 아침마다 남의 구두를 닦아야 했다. 경호실 관계자가 “각하 구두이니 잘 닦아라”고 하기에 그 외교관은 정성스레 약칠을 하고 구두 콧잔등에 침을 뱉을 때도 경건한 마음을 가졌다. 반들반들하게 닦인 그 구두는 엄청나게 큼지막했다. 나중에 살펴보니 그 구두는 경호원의 것이었다.

공정거래위원회에서 6년간 근무한 임영철 변호사가 최근 펴낸 ‘대통령의 나라에서 국민의 나라로!’라는 책이 세간에 화제가 되고 있다. 공무원들이 얼마나 쓸데없는 일을 많이 하는지를 적나라하게 고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정부과천청사 공무원들이 야근을 자주 하는 것은 업무량이 많아서라기보다는 상사의 편리를 위한 여러 가지 일을 하기 때문이다. 작은 표현이나 글자 하나를 고치려고 부하직원을 수 차례, 심지어 10회 이상 부르는 상사도 있다”면서 “(불필요한 일을 줄이면) 공무원 수를 절반 이하로 줄여 봉급을 배로 올릴 수 있다”고 주장했다.

민간인 입장에서도 비슷한 업무를 맡은 공무원 또는 준공무원들이 수두룩해 불편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어느 시중은행 임원은 “우리의 ‘상전’은 재정경제부 금융감독위원회 금융감독원 예금보험공사 한국은행 등인데 이들 기관에 툭하면 불려 다니고 온갖 보고서를 내느라 정작 고유업무는 뒷전으로 밀릴 지경”이라 하소연했다.

대통령 선거가 한달 앞으로 다가오면서 대선 후보들이 정부 조직개편을 공약으로 내세움으로써 누가 집권하든 공직사회에 회오리가 몰아칠 전망이다. 대부분의 후보들이 내놓은 개편안은 ‘조직 통폐합 및 축소’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각 부처는 나름대로 생존 논리를 개발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정보통신부 과학기술부 등은 서울대에, 교육인적자원부 보건복지부 해양수산부 등도 외부 연구기관에 ‘살아남는 방안’을 연구해달라고 일을 맡겼다. 이들 부처는 자기 조직에 ‘칼바람’이 몰아칠까봐 걱정되는 모양이다.

14일 열린 한 세미나에서 김광웅(金光雄)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전 중앙인사위원장)는 주제발표를 통해 “과거엔 관료들이 전문성 없는 명망가들을 꼭두각시 위원으로 앉혀놓고 뒤에 숨어서 조직개편을 좌지우지했다”면서 관료 주도의 정부조직개편에 대해 강도 높게 비판했다. 과거의 행태로 봐 정부조직개편은 앞으로도 힘들 것임을 암시하는 지적이다.

김대중(金大中) 정부가 내세운 개혁 과제 가운데 공공부문의 실적이 가장 미미한 원인은 관료조직의 집요한 저항 때문인 듯하다. 이 정권 출범 초기에 발족된 정부개혁실의 구성원들은 “공공부문의 군살을 도려내는 것이 독립전쟁이나 마찬가지로 어려운 일”이라며 실천의지를 다짐하기 위해 ‘선구자’ 노래를 부르며 업무를 시작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뜻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개혁정책의 바이블로 불리는 ‘정부혁신의 길(Reinventing Government)’이란 책은 “정부개혁은 지식이나 기법보다는 용기가 꼭 필요하다. 만약 문을 열 수가 없다면 창문을 통해서라도 들어가야 한다. 용기란 끈질기게 매달리는 것을 뜻한다”고 갈파했다.

정부 경쟁력이 떨어지면 국가전체가 위기에 빠질 수 있다. 우리는 외환위기에서 이를 뼈저리게 체험했다. 효율적인 정부조직 없이는 한국은 선진국이 되기 어렵다. 쓸데없는 일을 하며 국록을 축내는 관료들의 ‘철밥통’, 누가 깰 것인가.

고승철 경제부장 cheer@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