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이정철/켈리 맞는 北의 카드는…

  • 입력 2002년 9월 30일 18시 02분


제임스 켈리 미국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가 조지 W 부시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북한을 방문한다. 대통령 특사로서는 윌리엄 페리 전 조정관 이후 두 번째로 임명되는 고위 인사다. 미국은 무슨 구상이 있어 갑자기 대북 협상을 진행하고 있는 걸까. 이라크 전쟁에 대한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동맹국의 대북 포용을 지지하는 걸까. 그렇게만 보기에는 그 밑그림이 너무 큰 것 같다.

이 점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8월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에서 발간한 ‘한반도 재래식 군비통제’라는 보고서다. 이 보고서가 관심을 끄는 것은 켈리 특사가 2001년까지 이 연구소의 태평양 포럼 소장으로 있었기 때문이다. 즉 그 내용이 켈리 특사의 구상을 일정하게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電力보상땐 핵사찰 동의˝▼

이 보고서에 따르면 부시 행정부의 대북 포용과 북-미 대화는 새로운 단계로 진입하고 있다. 보고서에는 재래식 무기 협상이 북-미간 협상의 핵심 요소의 하나로 등장한다. 보고서는 그 해법으로 남한 북한 미국이 동시에 참여하는 3자간 포럼을 제안하고 있다.

CSIS의 제안은 의외일 수도 있겠지만, 부시 행정부가 북한과의 협상 의제에 재래식 무기를 올려놓을 때부터 이 같은 결론은 예상된 것이었다. 클린턴 행정부 시절처럼 재래식 무기는 남북간에 맡기고, 대량살상무기에 대해서만 북한과의 대화를 추진한다면, 미국의 대북 협상 의제에서 주한 미군 문제는 거론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미국이 북한의 재래식 무기를 굳이 거론한다면, 북한 역시 주한 미군의 대북 위협론을 거론할 것이다. 나아가 이는 남한의 안보 우산과도 연결된 복잡한 상황을 초래하게 된다. 이 점에서 재래식 무기를 협상 의제로 올리는 순간, 이미 한반도의 안보협력은 남북한과 미국 3자의 동시 협상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따라서 CSIS의 보고서는 북한의 이런 입장을 수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부시 행정부가 북한에 대해 던지는 대화 정책의 신호탄인 것이다.

문제는 미국의 새로운 포용정책이 실효를 갖기 위해서는 대량살상무기에 대한 해법이 포괄적으로 마련돼야 한다는 점이다. 이 점에서 도널드 럼즈펠드 미 국방장관의 최근 발언은 매우 중요한 실마리가 된다. 럼즈펠드 장관은 최근 두 차례에 걸쳐 북한은 이미 핵 보유국이라고 강조했다. 이 발언은 그 맥락이 북한을 이라크와 달리 대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대북 봉쇄에 의도가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럼즈펠드 장관의 발언은 제네바협정을 폐기하고 이 협정에서 약속된 경수로 대신 5, 6기의 화력발전소를 제공하자는 공화당식 해법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제네바협정이 북한의 전력 문제를 해결하는 데 초점을 두고 있기 때문이고, 이 점에 대해 어떤 방식이든 보장이 있으면 북한이 핵 사찰 문제에 동의할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이 깔린 것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 역시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가 핵 사찰에 대한 미국의 우려를 제기하자 ‘경수로 건설 지연’이 문제라고 답했다. 그것은 곧 핵문제의 핵심은 북한에 대한 전력 보상 문제라는 북한의 인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북한은 과연 켈리 특사에게 어떤 선물을 줄 수 있을 것인가. 미 국무부의 대북 대화노선에 대해 제동을 걸고 있는 미국 보수파들을 잠재울 수 있는 가장 큰 카드는 아무래도 제네바협상 체제의 수정인 것 같다. 북한의 입장에서는 어차피 2003년까지 지켜지지 못할 제네바협상 체제가 아니더라도, 전력 보상이라는 실리를 얻는다면 미국에 명분상의 양보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북한의 입장에서 이러한 카드는 전력과 3자회담에 대한 확실한 보장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국제협상은 항상 ‘배반’과 ‘불신’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北-美 냉정한 실무협상될 듯▼

이번 회담은 이 같은 가능성을 두고 냉정한 실무회담이 될 가능성이 높다. 다만 동북아 유관 국가들의 순환적 이익이 분명해짐으로써, 미국이 북한에 3자회담을 보장하고, 북한은 대량살상무기를 포기하는 대신 일본이 이를 보상하는 등의 포괄적 상호성의 실험이 성공한다면 의외의 결과가 나올 수도 있지만 말이다.

이정철 삼성경제연구소 북한연구팀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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