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장미의 이름' 빌려 에코 따라잡기…'황금사과'

  • 입력 2002년 5월 31일 17시 59분


영화 '장미의 이름'에서프란체스코 수사 윌리엄과 수련제자 아드소
영화 '장미의 이름'에서
프란체스코 수사 윌리엄과 수련제자 아드소
황금사과/김경욱 지음/342쪽 8500원 문학동네

때는 14세기. 프란체스코회 소속인 바스커빌 출신의 젊은 수도사 윌리엄은 부친의 절친한 친구였던 피에르 주교로부터 급히 와달라는 편지를 받는다. 뒤이어 도착한 소식은 놀랍게도 피에르 주교의 부음.

서둘러 베르송의 수도원에 도착한 윌리엄 앞에는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 연속해 일어난다. 잇따른 수도원 요인들의 죽음에서부터 흑사병의 흉흉한 풍문까지.

칼끝처럼 대립중인 교황과 프랑스 왕은 후임 주교의 선출을 위해 속속 사절을 파견하고, 베르송은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긴장과 음모 속으로 빠져든다. 윌리엄은 이성과 지식의 힘을 강조하는 제롬 사제에게 매혹되고, 피에르 주교의 죽음에 대한 의문을 파헤치는 그의 노력에 동참하는데….

“잠깐!” 독자는 여기쯤에서 틀림없이 제동을 걸 것이다. “바스커빌의 윌리엄이라면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 나오는 수도사 아냐? 영화에선 숀 코너리가 그 역을 맡았지. 제롬 사제와 윌리엄의 관계는 ‘장미의 이름’에 나오는 윌리엄과 아드소의 관계를 연상시키는군. 수도원을 배경으로 의문의 사건이 연속된다는 점도….”

모두 맞다. 단편집 ‘바그다드 카페에는 카페가 없다’(1996) 등에서 영화적 상상력에 기초한 글쓰기를 선보여온 작가는 이번에는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서 모티브를 빌려와 ‘약관(弱冠)의 윌리엄’이 경험한 프랑스 베르송에서의 한 편 미스터리극을 연출해내고 있다.

‘장미의 이름’과의 연속성도 텍스트 곳곳에 암시된다. 이야기의 화자(話者)인 윌리엄 자신이 ‘지금부터 내가 들려줄 이야기는 훗날 폼포사 인근의 베네딕트회 수도원에서 벌어졌던 엄청난 사건의 전사(前史)에 해당하는 셈’이라 밝히고 있으며, 심지어 ‘그 박학다식함이 오른편에 설 자가 없다는 알렉산드리아 사람 움베르토 에코’의 이름도 수도사의 언급을 빌어 등장하는 것이다.

혹 지나친 용기나 대담함의 발로는 아닐까. 동아시아에서 성장한 작가가 서양의 중세를 논한다는 점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풍부한 문헌과 해석능력이 갖춰진 오늘날 지나친 ‘주변부 의식’을 가질 필요는 없다. 문제는 ‘만 권의 책이 집약됐다’고 일컬어질 만큼 지식과 비의(秘意)로 가득찬 움베르토 에코의 텍스트에 자신의 텍스트를 병렬시키려 했다는 데 있다.

다행히도, 작가의 텍스트는 일정한 힘을 줄곧 유지하면서 독자의 눈을 끌어당긴다. 피에르 주교의 인장에 담긴 ‘물질 역시 의미를 내포한다’는 문장의 수수께끼, 선악의 대립에 대한 마니교적 견해, 14세기 교속(敎俗)대립의 역사적 배경에 대한 해설 등이 적소에 배치돼 지적 만족을 요구하는 독자들의 가려운 곳을 적절히 긁어준다.

반면 종장(終章)부근에서 그동안 넓게 벌려놓은 이야기를 가지를 추슬러 오무려놓지 않은 점은 ‘세일즈’의 관점에서도 분명 흠이 될 것이다. ‘장미의 이름’에서도 이미 차고 넘칠 만큼 등장했던 ‘지식과 신심의 대립’ ‘경건주의의 속박’ 등 테마는 이 작품에서도 지루할 정도로 되풀이된다. ‘사프란을 지나치게 넣은 쇠고기’처럼 과도한 양념으로 재료의 맛을 떨어뜨린 것은 아닐까.

“소설이란 무엇이며 소설을 쓴다는 것은 또한 무엇인가(…)텍스트로부터 될 수 있는 한 멀찍이 거리를 두려 했다. 그러다 보니 서양의 중세까지 가게 되었다. 참 멀리까지 간 셈이다”라고 작가는 후기에서 말했다. 완결되지 않고 열려 있다는 점에서 이것은 ‘작품’이 아니라 ‘텍스트’라고도 그는 주장했다.

아무려면 작품이면 어떻고 텍스트이면 어떻겠는가. ‘장미의 이름으로 태초의 장미가 존재하지만, 우리가 갖는 것은 빈 껍데기 이름뿐’(움베르토 에코) 인 것을.

유윤종기자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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