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

  • 입력 2002년 2월 1일 17시 27분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르네 지라르 지음 김치수 송의경 옮김/429쪽 2만원 한길사

왜 고급 승용차와 멋있는 스타를 선망하고, 유행과 패션을 따르는가? 왜 애정의 삼각관계가 강렬하고 짜릿한 쾌감을 주는가? 욕망이란 인간의 영원한 수수께끼다. 프랑스의 문학평론가이자 사회인류학자인 르네 지라르는 현대인들의 욕망이란 욕망의 주체, 대상, 중개자가 각각 꼭지점을 이루는 삼각형의 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욕망은 원하는 대상으로부터 바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지금 소유하고 있는 중개자(모델 또는 라이벌)에 의해 간접적으로 잉태된다는 것이다.

모방적 욕망은 이미 고대 그리스 신화나 비극, 세익스피어의 작품 속에서 교묘하게 감춰진 질투나 선망(envy)의 모습으로 나타나 서사적 갈등구조에 역동성을 부여했다. 삼각형 구조를 갖는 모방적 욕망은 모방자와 모델의 경쟁적 관계에 따라 외면적 간접화와 내면적 간접화로 구별된다. 가령 돈 키호테는 아마디스 데 가울라를 통해 이상적 기사의 전형을 동경하며, 산초 판사는 주인을 통해 자신의 섬(왕국)을 꿈꾼다. 이는 외면적 간접화의 전형적인 예로서, 주체와 모델 사이의 거리가 불변하며 그들 사이에 어떤 교환도 없는 경우이다. ‘보바리 부인’의 주인공 엠마도 지방 부르주아들을 통해 파리 상류사회를 동경하지만, 이들과 감히 경쟁할 수 없다는 점에서 외면적 간접화의 한 예로 꼽힌다.

그러나 내면적 간접화의 경우, 모방자와 중개자가 서로 경쟁 관계에 놓이면서 보다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되는데, 이는 중개자가 적극적으로 욕망을 촉발시키기 때문이다. 예컨대 스탕달의 소설 ‘적과 흑’에서 레날과 발르노가 쥘리앙의 가정교사 영입을 놓고 경쟁하는 것은, 욕망의 대상인 쥘리앙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를 차지하는 것이 상대보다 사회적 우위를 점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중개자는 부단히 모방자에게 ‘나를 따라 하라’고 주문한다. 그러나 정작 모방자가 중개자와의 차이를 없애려고 경쟁적으로 모방할 경우, 중개자인 모델은 갑자기 ‘나를 따라 하지 말라’고 외치면서 게임의 규칙을 뒤엎는다. 이때 모방자는 그에 대한 증오심과 함께 심리적 분열상황에 빠지는데, 이유는 그가 겉으로는 중개자(모델)가 설치한 장애물에 크게 절망하고 증오하지만 내심 그에 대한 선망은 소멸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경우 타자는 ‘지옥’인 동시에 강렬한 모방의 대상으로 변모하고, ‘사람들은 서로에게 신으로 비치게’ 된다. 궁극적으로 모델이 모방자에게 대상에 대한 접근을 금지하는 한, 경쟁적 모방 욕망은 극도의 숭배와 증오심, 더 나아가 폭력을 잉태하게 마련이다.

도스토예프스키가 니체와의 진지한 대화를 펼치는 소설 ‘악령’에서 스타브로긴과 키릴로프는 타인에 대한 숭배와 증오심의 절정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욕망과 증오의 화신인 스타브로긴은 타자들을 노예화하는 절대적인 주인으로 군림함으로써, 극도의 오만과 자기분열로 파멸한다. 그와 달리 키릴로프는 예수의 희생을 모방하고 니체적 비전을 구현하기 위해 자살하는 대목에서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은 결정적인 국면에 이른다.

그렇다면 왜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인가? 유럽 낭만주의 작품에 나타나는 인물들은 스스로 욕망하고 의지대로 행동하는 인간처럼 묘사된다. 그러나 욕망의 메커니즘을 심층적으로 살펴보면, 그들의 욕망은 독립적이고 오만한 겉모습과는 달리 매개되고 모방된 욕망이며, 절대화된 타자를 간절히 열망하는 허영으로 가득 차 있다. 그 이유는 그들은 ‘자아라는 제단 위에 세상을 제물로’ 바치려 하지만, 정작 숭배하는 대상은 타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낭만적 열정도 알고 보면, 상대방에 대한 헌신이 아니라 ‘경쟁적 허영심 사이에서 일어나는 무자비한 전쟁’일 뿐이다. 그러므로 소설은 전염성이 강한 형이상학적 욕망을 폭로하고 주체와 중개자의 ‘주인-노예’의 상태를 여지없이 드러내는 진실의 표현방식이 된다.

지라르의 매개적 욕망이론의 가설은 야심차고 담론 구성력은 매력적이다. 특히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적 욕망구조를 포괄하는 매우 간단하고 경제적인 욕망의 모델을 제시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허나 쟁점은 바로 이곳에서 발생한다. 욕망은 경쟁적 모방의 구성물이라는 지라르의 주장은, 욕망이란 매개 없이 리비도나 충동, 이드와 무의식에 의해 기능한다는 프로이트의 이론과 정면으로 충돌하기 때문이다.

지라르에 따르면 욕망이란 무의식이 아니라 너무나 또렷한 이성의 교묘한 전략이며, 부자간의 오이디푸스적 성적 욕망의 갈등구조 가설도 허구에 불과하다. 더 나아가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도 가족적 차원에서의 삼각형 욕망의 한 부분일 뿐이므로, 오이디푸스 신화가 집단 무의식의 원형으로 확대 해석되는 것을 경계한다. 그렇다면 과연 그의 욕망이론은 프로이트의 정교한 과학적 개념도구와 해석학적 지평, 그리고 프로이트에 빚지고 있는 온갖 사상의 건축물들을 해체할 만큼 예리한 분석도구와 총체적인 조망을 갖추고 있는 걸까?

지라르의 욕망이론은 다소 엄격하고 도식적이며 복음주의적 도덕론의 한계를 보이고 있다. 뤼시앙 골드만 류의 유물론적 문학사회학과 달리, 그는 중개자가 휘두르는 ‘형이상학적 위력’을 낭만적 소설의 주인공들이 종교적인 수행과 구원의 방식으로 초월하는 모습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타자에 대한 모방적 욕망이 야기하는 폭력의 순환고리를 끊는 유일한 대안은 ‘속죄양’인 예수를 모방하는 길뿐이라고 지라르는 주장한다.

이런 지라르의 욕망이론은 미국과 프랑스에서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그의 정치한 논증력과 탄탄한 문체는 독서의 쾌락을 보증하며, 인류학 정신분석학 문학 철학의 경계를 거침없이 넘나들면서 펼치는 담론의 진경(珍景)은 원전과 번역 사이에 놓인 40년의 시차를 대번에 상쇄하면서 그를 인문학 거장의 반열에 올려놓는다.

김동윤(건국대 교수·불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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