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광주항쟁 실증적 검토나선 정찬 신작 '광야'

  • 입력 2002년 1월 20일 17시 54분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룬 소설? 별로 새로울 것도 없을 것 같은데, 이젠 좀 지겹지 않나?

다채로운 ‘지적 문제 소설’을 잇따라 발표해 온 중견 작가 정찬씨(49·사진)의 신작 장편 ‘광야’(문이당)를 받았을 때의 솔직한 첫인상이었다.

수 년간의 자료조사와 1년반이 넘는 산고를 겪은 그는 “지금까지 광주항쟁에 대해 들어온 많은 이야기는 실체의 거죽일 뿐”이라고 잘라 말했다. “전대미문의 대사건의 실체를 인간의 본질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려는 노력은 거의 없었다”는 설명이다.

사실 이에 대한 문단의 관심은 직무유기에 가깝다. 지난 20여년간 광주민주화운동을 소재로한 몇몇 중 단편 소설과 한 두편의 장편소설이 있었지만 다큐멘터리적 접근에 머물렀다.

‘광야’ 역시 실증적인 검토를 통해 당시의 긴박했던 상황을 세밀하게 되살리고 있다. 사태의 전말을 목격한 외신기자 테리 머턴의 회상을 통해 1980년5월18일 오후4시부터 전남도청이 계엄군에 의해 점령된 26일 새벽까지를 벌어진 일련의 급박한 사건들을 그렸다. 하지만 이 작품은 사실(史實) 자체에 머물지 않고 무자비한 폭력 앞에 맞선 인간들의 다양한 반응 양상을 통해 사건의 진실에 접근하려 한다.

광주민주화운동을 다시 불러옴은 단지 “권력에 대한 투쟁은 망각에 대한 기억의 투쟁이다”는 밀란 쿤데라의 잠언을 소설로 보여주기 위함은 아니다. 나아가 5월 광주를 ‘너와 내가 하나가 되고, 산 자가 죽은 자의 그림자 속으로 뛰어드는 기묘한 세계’로 확장시키고자 함이다.

“내가 ‘5월 광주’를 그토록 오랫동안 들여다본 것은 죽음에 에워싸인 인간의 드라마틱한 모습 때문이었다. 어떤 죽음도 혼자의 죽음이 아닌 것은 없다. 동시에 어떤 죽음도 혼자의 죽음인 것은 없다.”

이를 구체적으로 보여주고자 정씨는 다양한 인간군상을 등장시켰다.

‘해방 광주’를 이끄는 강경파 박태민을 통해 항쟁의 정치적 의미를 살폈고, 시민군으로 투항하는 공수부대원 강선우를 통해 진압군의 살상이 베트남전의 경험과 연관됨을 드러냈다. 한편 광폭한 폭력 앞에서 무기력을 느낀 도예섭 신부를 통해서는 백주의 죽음과 죽임을 인간구원의 문제로 넓힌다.

이들 가상인물 외에도 전두환 보안사령관과 주한 미국대사 글라이스틴, 미군사령관 위컴, CIA 한국지부장 브루스터 등 실제 권력자들의 내면까지 담아서 실제감과 흥미로움을 더한다.

부산 출신인 ‘PK 작가’는 “내가 광주 출신이 아니라는 사실이 소설의 진정성을 깍아내리려는 지역주의의 편견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면 다행이다”고 말했다.

윤정훈기자diga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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