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김원일 장편소설 '슬픈 시간의 기억'

  • 입력 2001년 8월 10일 18시 26분


▼'슬픈 시간의 기억' 김원일 저/311쪽 8000원/문학과지성사▼

지난해, 이십 년 동안 정기적인 모임을 통해 모셔온 선생님 한 분을 떠나 보냈다. 평소 자기 관리에 투철하신 분답게 죽음마저도 너무 깨끗해서, 애통하다기보다 탄복할 정도였다. 한데, 지금껏 떠오르는 의문 하나가 있다. 다른 평범한 인간들과는 달리, 선생님은 과연 생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두려움도, 미련도 없이 죽음을 맞이했을까?

김원일의 연작 장편소설 ‘슬픈 기억의 시간’의 해석을 빌리면, 누구도 죽음과 화해하면서 죽음을 맞이할 수는 없다.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데 급급한 인생을 살아온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많이 배워서 현실의 이념이나 역사적 인식마저 초월한 사람에게도 죽음은 ‘깜깜한 어둠’이요 ‘이 지상의 모든 것과의 슬픈 이별’이다.

다만 종교인은 예외일 수 있는데, 그러나 그에게도 죽음은 신 앞으로 직접 나서는 일이므로 역시 두려운 세계이다. 김원일은 죽음, 특히 웬만큼 수를 누리고 가는 노령의 죽음은 ‘의식은 더 살고 싶은데 몸이 자살을 감행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일제와 전쟁과 분단의 혼란 속에서 삶을 지탱해온 인물 네 명의 임종 과정을 주된 이야기 축으로 입증해 보인다.

일본군 위안부에, 양공주 경력을 지녔으되 이를 외적인 치장으로 가리며 살아온 한 여사(‘나는 누군인가’), 색욕과 물욕으로 살인까지 저지르며 살고도 후회 없이 자기 편리만을 채우려는 초정 댁(‘나는 나를 안다’), 개인과 시대의 비극을 몸소 겪으면서도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선을 일관되게 실천해온 윤 선생(‘나는 두려워요’), 거듭되는 현실의 폭력에 만신창이가 되고도 타고난 기질 그대로 거듭 현실에서 도망쳐 책을 벗하며 시간을 견뎌온 김중호(‘나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 네 사람은 이 장편을 이루는 연작 네 편 각각의 주인공으로서, 말년에 이르러 한 양로원에 의탁해 지내고 있다가 치매에, 복합 장애에, 암에, 혹은 탈진 상태에 이르러 모두 최후의 순간을 맞는다.

그러는 사이 그들의 일생이 현재와 과거의 빈번한 넘나듦, 의식과 무의식의 숨가쁜 교차 속에 무수한 파편들로 표출되면서, 각각 한 편 한 편의 파란만장한 인생사로 부각되기도 한다. 그 역동적인 네 편의 인생사 중에서도 나는 두 사람의 이야기가 소설에서의 매력적인 두 측면, 즉 극적 쾌감과 사색적인 분위기를 각각 담당해 준다는 생각을 했다.

자기 확신이 지나쳐 언제나 스스로 탐욕을 ‘개척’해 나간 초정댁, 자기 환멸이 지나쳐 밀실에서 독서와 메모로 살아온 지식인 김중호가 그들이다. 어쨌든 그런 녹록지 않은 인생사 때문에 더욱, 임종을 앞둔 이들의 생에 대한 애착이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의 표정이 너무 치열해 보인다.

이 소설은 심각한 노인 문제를 겪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늙어서 죽는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룬 거의 최초의 작품으로, 결국 인간은 어떤 존재이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라는 반성적 질문을 다시금 생생하게 솟구치게 했다.

게다가 누가 읽어도 전혀 막힘 없이 읽히는 속도감마저 있으니, 자본주의의 전면적인 폭력 앞에서 ‘무현실주의’와 ‘경박한 현실주의’로 ‘얻어터지고’ 있는 한국 소설계에 경종을 울릴 신선한 역작임이 분명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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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덕규(소설가·협성대 문예창작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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