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숨은 고전과의 설레는 만남 '대산 문학총서'

  • 입력 2001년 6월 8일 18시 53분


◇ 대산 세계문학총서 ‘트리스트럼 샌디’ 외'/로렌스 스턴 외

/각권 350쪽/ 1만원 내외 /문학과지성사

문학과 인문학의 위기 의식이 고조되고 있는 요즘, 문학과 인문학이 왜 필요한가를 웅변으로 말해주는 다섯 종의 고전 번역서가 출간되었다. 상업출판사들이 출간을 꺼리는 소위 ‘비 간판급’ 고전문학의 번역 출판을 지원하는 ‘대산 세계문학총서’의 1차분 성과다.

눈에 띄는 것은 단연 로렌스 스턴의 ‘트리스트럼 샌디’다. 새뮤얼 리처드슨의 ‘파멜라’와 헨리 필딩의 ‘톰 존스’와 더불어 18세기에 등장한 근대소설의 효시이자 탁월한 고전이면서도 그 파격적인 실험성과 혁신적 기법으로 인해 이 작품의 국내 번역 출간 가능성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트리스트럼 샌디’는 길을 잃고 방황하던 20세기 후반 포스트모던 작가들의 새로운 상상력에 불을 붙여준 중요한 고전이다. 예컨대 미국작가 존 혹스는 “나는 플롯, 등장인물, 배경, 그리고 주제야말로 소설의 진정한 적이라는 가정 하에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라는 유명한 말을 했다. 18세기에 벌써 줄거리나 인과관계를 무시하고 열린 결말을 시도함으로써, 스턴은 포스트모던 작가들의 원조가 되었다.

‘트리스트럼 샌디’는 언어의 한계를 벗어나 그림과 점선도 활용하고, 의식의 흐름 기법 등 다양한 실험을 시도했던, 진정 시대를 앞서가는 소설이었다. 무질서한 이야기들을 내내 늘어놓다가, ‘아이고! 도대체 이게 다 무슨 이야기랍니까?’라는 재미있는 말과 함께 끝난다.

그렇다면 질서와 규범의 시대를 살았던 스턴은 왜 그러한 자유분방한 비정통적인 소설을 썼을까? 그는 트리스트럼의 혼란스러운 삶을 묘사한 소설을 통해 인생이란 사실 우연과 불확실성으로 가득 찬 것이라고, 그래서 유머와 패러디로 삶을 포용해야만 한다고 말한다. 트리스트럼은 자신이 수태하는 결정적인 순간,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당신, 시계 밥 주는 것 잊지 않았지요?”라고 말해 김이 샜고, 그래서 자기 인생이 처음부터 어긋났노라고 말해 독자들을 즐겁게 한다.

이후, 마치 실타래처럼 뒤엉킨 트리스트럼의 삶은 곧 우리가 풀어야할 인생의 수수께끼이자 동시에 미로 같은 우리 현실의 은유로 제시된다. 그래서 스턴에게 문학은 곧 인간의 삶과 상통하며, 소설을 어떻게 쓸 것인가는 곧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와 연결된다.

“‘트리스트럼 샌디’는 인간 영혼의 가장 깊은 심연을 보여준다”고 평했던 독일 시인 하이네의 시집 ‘노래의 책’ 완역본도 또 하나의 값진 성과다. 그동안 일부만 번역된 관계로 주로 연애시인으로만 알려져 온 하이네는 이번 완역본을 통해 훌륭한 사회비판 시인의 면모도 보여주고 있다. 애송시 ‘미라보 다리’로 유명한 프랑스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의 시집 ‘알코올’ 역시 시를 사랑하는 독자들에게 기쁨을 준다.

또 멕시코 작가 호세 호아킨 페르난데스 데 리샤르의 ‘페리키요 사르니엔토’는 스페인 문학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난 중남미 최초의 문학작품이라는 점에서 가치 있는 번역 출간이었다. 미국의 흑인여성작가 조라 닐 허스튼의 ‘그들의 눈은 신을 보고 있었다’도 좋은 작품이기는 하지만, 이미 얼마 전 국내에 번역본이 나와서 그만 중복 출판이 되고 말았다. 다만 번역문장이 매끄럽고 좋아서 나름대로 가치는 있다고 생각되었다.

김성곤(문학평론가·서울대 영어영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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