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이민웅/말꾼과 일꾼

  • 입력 2001년 6월 8일 18시 41분


“텍스트가 모든 것이고 텍스트 바깥에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프랑스 철학자 데리다의 유명한 언명이다. 심지어 어떤 포스트모던 인류학자는 “만약 어떤 민족의 언어에 오르가슴이라는 낱말이 없다면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오르가슴을 경험할 수 없을 것”이라고 극언하기도 한다. 이 정도면 가히 언어 결정론이라고 할 만하다. 우리가 현실이라고 믿는 것은 모두 언어의 산물이라는 주장이다. 확실히 말은 말로만 끝나지 않는다. 말은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래서인지 요즘 정부, 정당, 기업, 학교, 이익단체, 시민단체 등 우리 사회 도처에서 말 잘하는 사람들이 득세하고 있다. 말만 그럴듯하게 잘 하면 일을 하지 않고도 일을 한 것처럼 만들 수 있고, 잘못을 저지르고도 늠연하게 피해갈 수 있다고 믿는 것 같다. 뿐만 아니라 말을 번지르르하게 잘하면 국회의원 장관은 물론이고, 그보다 더한 자리도 차지할 수 있다고 보는 것 같다. 그러니 중요 기관마다 미디어 컨설턴트를 고용하여 홍보에 열을 올리고, 힘깨나 쓰는 사람들은 이들의 자문을 받아 언론을 상대한다.

▷말 잘하는 사람들의 행태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질이 나타난다. 우선 행동보다 말이 앞선다. 또 불리한 것은 한사코 숨기고 말을 잘 꾸며댄다. 그것으로도 안 되면 말을 바꾸고 심지어 거짓말까지 서슴없이 한다. 그러다가 거짓이 들통 나 궁지에 몰리면 핑계를 대고 남에게 책임의 대부분을 전가한다. 주변을 살펴보라. 어찌된 일인지 근년에 와서 일할 생각은 않고 말로만 판을 짜려는 이런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왜 이런가. 본보기가 많아서 인가.

▷엄밀하게 말하면 언어가 현실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부합될 수도, 부합되지 않을 수도 있는 ‘현실에 대한 언술’을 구성할 뿐이다. 그 언술이 우리가 실제로 겪는 현실과 부합되지 않을 경우 우리는 그 언술을 불신하게 된다. 무엇보다도 말꾼들이 설치는 세상의 가장 큰 폐해는 말 없는 일꾼들의 일할 의욕을 꺾어 놓는 것이 아닐까 한다. 13일 대통령의 기자회견을 지켜보자.

이민웅 객원논설위원

(한양대 신방과 교수)

minwlee@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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