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가 흐르는 한자]董狐之筆(동호지필)

  • 입력 2001년 4월 17일 18시 27분


‘歷史’의 생명은 嚴正한 記述에 있다. 이 때문에 우리나라와 중국은 예로부터 史官을 두되 보호하였으며 그들이 쓴 史草는 설사 帝王일지라도 열람할 수 없도록 못을 박았다. 행여 外壓(외압)에 의해 잘못 記述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春秋時代 晉의 靈公(영공)은 폭군이었다. 苛斂誅求(가렴주구)로 백성의 膏血(고혈)을 짜내 궁중의 담을 장식하는가 하면 걸핏하면 樓臺(누대)에서 잔치를 벌여 사람을 던져 죽이는 것을 즐겼다. 또 궁중 주방장이 熊掌(웅장·곰 발바닥)을 좀 덜 삶았다고 죽여 시체를 난도질해서는 광주리에 담아 궁녀를 시켜 머리에 이고 다니게 했다. 참다 못한 승상 趙盾(조순)이 수차 諫言(간언)했지만 오히려 刺客(자객)을 보내 죽이려고 했다.

어느 날 아침, 刺客이 趙盾의 집을 찾았을 때 그는 朝服으로 정장을 한 채 瞑想(명상)에 잠겨 있었다. 刺客은 차마 그를 죽이지 못하고 스스로 나무에 머리를 받아 自決하였다. 靈公은 계획을 바꿔 酒宴(주연)에 초대하여 죽이고자 했다. 술이 반쯤 돌았을 때 갑자기 伏兵(복병)이 덮쳐 죽이려고 하였다. 이 때 호위병 하나가 막아서는 바람에 일대 격투가 벌어졌다. 이 틈을 타 그는 무사히 빠져 나올 수 있었다. 옛날 사냥을 나갔을 때 사흘을 굶어 신음하던 靑年을 구해 준 적이 있었는데 알고 보니 후에 그는 靈公의 호위병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靈公의 포악함은 날이 갈수록 더해갔고 마침내 趙穿(조천)은 그를 죽이고 만다. 그는 趙盾의 사촌 동생이었다. 陰謀(음모)를 미리 알고 있었던 趙盾은 잠시 국경 부근으로 피신했다가 돌아왔다. 당시 晉의 史官은 董狐(동호)였다. 그는 史冊(사책)에다 이렇게 적었다. ‘조순이 國君을 弑害(시해)했다.’ 깜짝 놀란 趙盾이 극구 변명하자 董狐가 말했다.

“국난 중에 丞相의 몸으로 도망간 것만 해도 잘못인데 돌아와 逆賊(역적)을 다스리지도 않았으니 弑害의 장본인은 당신이 아니고 누구겠소?” 후에 孔子는 董狐의 爲人(위인)을 격찬했다.

이 때부터 董狐는 史官의 代名詞가 되었으며 董狐之筆이란 ‘董狐의 筆法’, 즉 歷史를 記述하되 權勢 따위에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있는 그대로 기록하는 것을 뜻하게 되었다. 董狐直筆(동호직필)이라고도 한다.

日本의 歷史 記述을 생각한다. 汚辱(오욕)을 위한 粉飾(분식)과 美化의 도구인가. 그들에게 한 말씀 忠告하고 싶다. ‘董狐直筆!’

鄭錫元(한양대 안산캠퍼스 교수·중국문화)

sw478@yahoo.co.kr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