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창순의 대인관계 클리닉]가벼운 '입'

  • 입력 2001년 2월 27일 19시 16분


◇"그의 입에 오르면 웃음거리 될라' 속마음 터놓을 깊은 만 남 힘들어

30대 초반의 S씨. 그는 주위에서 재기발랄하다는 평을 듣는다. 한편에서 그에 대해 악담하는 사람들은 ‘죽어서 입만 둥둥 뜰 친구’라고도 하지만. 아무튼 그를 만나는 순간부터 사람들은 그가 가지고 있는 지식에 압도당한다. 예를 들어 안 읽은 책이 없고, 안 본 영화가 없고 안 마셔본 와인이 없고 등등.

그러나 아는 사람들은 안다. 조금만 더 들어보면 그렇지도 않다는 것을. 책은 서문만 읽은 것이고 영화는 소개글만 본 것이고 와인에 대한 것도 귀동냥인 것이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마치 직접 체험한 양 말하는 재주 하나는 놀랍다.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마치 최면에라도 걸린 것처럼 그의 이야기에 빠져들어간다. 그는 그런 분위기를 한껏 즐기고.

사람들은 모임의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서라도 그를 초대한다. 그런 그라 아는 사람은 무지하게 많다. 서울에 사는 사람들, 아니 어쩌면 대한민국에 살면서 내로라 하는 사람들 중 그가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 같은 분위기이다. 스스로 그것이 자랑이고. 그러나 그에게 속마음을 털어놓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입 가벼운 그에게 털어놓고 싶지도 않고 얘기해 봤자 진지하게 귀기울일 것 같지도 않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것은 자기 이야기가 그의 재치 넘치는 일화에 등장해 모든 사람들의 우스갯거리가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피해의식 때문이리라.

흔히 사람들이 대인관계에서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의 하나가 말을 잘해야 한다고 여기는 것이다. 요즘 말 잘하고 유머있는 사람이 뜨는 것은 사실이다. 사회 분위기조차 이른바 ‘개인기’가 있어야 한 건 하는 시대 아닌가. 물론 말을 잘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단 그것의 깊이가 있어야 한다.

S씨처럼 깊이가 없다면 대부분의 인간관계는 피상적인 데 그치고 만다. 마치 케이크의 겉에 발린 설탕과 같다고 할까. 얼핏 느끼기에는 달지만 씹는 맛이 없으니 일회적인 만남으로 끝나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 한탄하는 것이 있다. 평소 그렇게 들끓던 사람들이 자신이 위기에 처하면 다 사라지고 없다는 것이다. 당연하다. 깊이 없는 만남이니 인생의 위기를 같이 나눌 수 없는 것이다. 그보다는 폭은 좁더라도 “나는 어떤 경우에도 너를 도와주겠어”라고 할 수 있는 친구 한 명을 만드는 것이 더 값지지 않을까.

(신경정신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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