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메이션]설 연휴 볼만한 애니

  • 입력 2001년 1월 19일 15시 29분


휴일이면 철저하게 집에서 지내는 이른바 '방콕족'들에게 설 연휴는 최고의 순간이다. 최소 3일은 보장되는 이번 설 연휴. 색다르게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은 어떨까?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비디오숍에 볼만한 애니가 그리 많지 않았는데, 이제는 다양성과 재미를 고루 갖춘 작품들이 꽤 많이 나왔다. 그중 극장에 개봉되지 않고 비디오로만 출시된 '숨은 걸작' 몇 편을 소개한다.
(단, 살고 있는 지역의 비디오숍 사정에 따라 없는 작품들도 있으니 미리 확인해 볼 것. 아예 두고두고 감상할 요량으로 테이프를 구입해서 소장해도 괜찮다.)

▼애니, 그 속에는 뭔가 재미있는 것이 있다▼
<만화의 세계 1.2>(1편:48분 2편:90분 KJ 엔터테인먼트(548-6191))

'캐나다국립영화제작소(National Film Board of Canada, 약칭 NFBC) 출신 작가들의 작품을 모은 단편집이다.

장편 애니메이션에 치중하는 우리와 달리 캐나다는 정책적으로 단편 애니메이션 작가에 대한 지원이 활발하다. 애니메이션이 가진 예술성과 교육적 가치를 높게 평가하기 때문이다.

NFBC는 그런 캐나다 애니메이션 정책의 상징이다. 상업적인 성공 여부보다는 작품성을 우선으로 하는 NFBC는 캐나다 출신이 아닌 다른 나라의 작가들도 지원을 하고 있다.

<만화의 세계>는 'NFBC'의 지원을 받은 작가들의 작품중 대표작을 모아 비디오로 제작을 했다. 모두 이슈 파텔, 캐롤라인 리프, 코 회드만, 자크 드로엥, 조지 웅가, 게일 토마스 등 단편 애니메이션계에서는 쟁쟁한 명성을 '스타'들이다. 이중 이슈 파텔과 캐롤라인 리프는 국내 애니메이션학과 학생들이 특히 좋아하는 작가들.

이슈 파텔의 '파라다이스', 캐롤라인 리프의 '거리의 소년', 자크 드로엥의 '밤의 천사' 등 다양한 기법과 탁월한 상상력을 발휘한 작품들이 수록돼 있다. 특히 2편으로 구성된 비디오중 1편은 제작과정과 기법을 소개하고 있어 애니메이션에 대해 깊게 알고 싶어하는 이들에게도 적격이다.

비디오 제목이 다소 엉뚱해 일반 비디오숍에서 찾기가 만만치 않은 것이 흠.

▼촌철살인'의 익살을 만끽할 수 있는 아드만의 소품들▼
<피브 앤 퍼그>(70분, 새롬 앤터테인먼트(518-3373))

고정 팬이 많은 아드만 애니메이션의 초기 작품을 모은 단편집.
올 겨울 <치킨런>으로 '애니메이션은 디즈니가 아니면 어렵다'는 국내 극장가의 편견을 깬 아드만의 재기발랄한 아이디어를 볼 수 있다. 전체적으로 20분 안팎의 소품들이지만, 작품마다 개성이 넘친다. 아드만의 첫 아카데미 단편 애니메이션상 수상작인 '동물 인터뷰(Creature Comforts)'를 비롯해 '왕자와 거지' '아담' '사랑이란' 등 9편의 단편이 수록됐다. 작품마다 스타일이나 소재가 달라 클레이 애니메이션의 다양함을 즐길 수 있다.

동물원의 수용된 각종 동물들이 마치 거리 인터뷰를 하듯 그들의 불만을 털어놓는 '동물 인터뷰'는 이 단편집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 아카데미상을 비롯해 국제 페스티벌의 각종 상을 수상했고, CF 시리즈로도 제작된 아드만의 초기 대표작이다. 실제 거리 시민들의 인터뷰를 보는 착각을 일으키는 동물 캐릭터들의 능청스런 표정들은 '연기'를 한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절묘하다. 동물들의 특성에 맞춘 절묘한 대사와 성우들의 연기도 탁월하다. 애니메이션은 실제처럼 멋있게 움직여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깨고 있다.

서로 다른 삶을 살게된 형제를 통해 귀족들에 대한 조소를 담은 '왕자와 거지', 팀 버튼의 영화를 연상시키는 그로데스크한 분위기의 '잃어버린 핸드백', 사랑과 자기도취에 대한 풍자를 담은 '사랑이란' 등 수록된 다른 작품들도 유쾌한 익살을 담고 있다.

지루한 연휴 낮에 가족이나 아이들과 함께 봐도 즐겁다.

▼위대한, 너무나 위대한 작가 정신▼
<위대한 강(Le Fleuve aux Grandes Euex)>
(24분 라바필름(765-8312))

애니메이션계의 살아있는 거장중 한 명으로 꼽히는 캐나다 프레데릭 벡의 93년 작품.
한 장 한 장 애니메이션에 필요한 그림 모두를 혼자 손으로 그리는 것으로 유명한 프레데릭 벡이 69세때 발표한 가장 최근작이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대표작 <나무심은 남자>(87년)에서 전쟁으로 피폐해진 산에 마치 수도를 하듯 나무를 심어 푸르른 숲을 되살린 에르제알 부피에의 삶을 소개했던 벡은, <위대한 강>에서는 캐나다 퀘벡 지방을 흐르는 센트 로렌스강을 소재로 그 지역의 자연이 겪은 역사와 인간들의 환경파괴를 다루고 있다.

마네나 샤갈, 루소의 그림을 연상케 하는 애니메이션의 그림은 모두 프레데릭 벡이 반투명 셀에 파스텔이나 색연필로 그린 그림들. 그는 늘 그래왔듯 <위대한 강>도 무려 5년여에 걸쳐 애니메이션에 들어간 수 만장의 동화를 모두 혼자 그렸다. 한 컷 한 컷이 마치 한 폭의 그림을 보듯 탁월한 완성도를 자랑하는 그의 작품은 그래서 고집스런 한 애니이션 작가의 열정이 어디까지 이를 수 있는지 보여준다.

그가 고희를 앞두고 이렇게 강한 집념을 보인 것은 자신이 살고 있는 퀘벡의 자연이 인간의 탐욕으로 인해 파괴되는 현장을 더이상 지켜볼 수 없었기 때문.

영화배우 도널드 서덜랜드의 차분하지만 힘있는 나레이션으로 진행되는 작품에서는 아름답고 평화로운 센트 로렌스강의 자연이 어떻게 훼손되는가를 가슴 섬뜩하게 그리고 있다. 24분이라는 짧은 시간에 300년이 넘는 역사를 압축시킨 이야기 솜씨도 탁월하다.

프랑스 안시, 일본 히로시마, 캐나다 오타와 등 세계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의 그랑프리를 모두 휩쓸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아이와 함께 볼 때 두 배로 재미있어요▼
<우리 할아버지(Grandpa)>(25분, 인피니스(2263-3233))

영국의 유명한 동화작가 존 버닝햄의 동명 그림책을 소재로 제작된 작품.
크리스마스면 단골로 방송되는 <스노우 맨>의 제작진이 89년 다시 모여 제작한 작품이다.

혼자 사는 할아버지를 찾아온 손녀가 할아버지가 읽어주는 동화의 세계로 여행을 떠난다. 때로는 노아의 방주에 함께 타기도 하고, 화려한 무도회의 주인공이 됐다가, 정글탐험의 아슬아슬한 스릴도 맛본다.

<스노우맨>처럼 색연필의 질감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영상이 무엇보다 온기를 지니고 있어 참 좋다. 어린이를 위한 동화의 형식을 띠고 있지만, 어른들도 어린 시절을 돌이키며 가슴 뭉클해질 수 있는 작품이다. <스노우맨>에서 애잔한 선율을 들려주었던 하워드 블레이크는 이 작품에서도 작곡과 삽입곡의 작사까지 맡아 티없이 맑고 순수한 동심의 세계를 그리고 있다. 즐겁고 경쾌한 조손의 이야기로 시작해 가슴 찡한 결말로 끝나는 이 작품을 본 후 자녀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면 더 좋다.

▼고즈넉하고 유유자적하는 동양적 미의 즐거움▼
<피리부는 목동>(19분 라바필름(765-8312))

대학의 애니메이션 영화제나 시네마 테크에서 단골 상영작으로 인기가 높았던 작품.
중국 수묵 애니메이션의 걸작으로 불리는 작품으로 상하이 스튜디오의 테웨이 감독이 63년 제작한 19분21초짜리 단편이다.

국내에 소개됐을 때 애니메이션하면 일본이나 미국, 또는 유럽의 작품만을 생각하는 이들에게 "아니 그곳에도 애니메이션이 있었나?"라고 신선한 충격을 줄 수 있는 작품이다. 만들어진지 벌써 40년이 다됐지만 지금 봐도 늘 잔잔한 감동을 느낄 수 있다. 내용은 무척 단순하다. 소치는 목동의 한나절을 그리고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이 작품을 추천하는 것은 재미있는 사건과 줄거리를 능가하는 탁월한 '볼거리' 때문이다. 구름 속에 아련히 떠 있는 것 같은 산과 부드러운 곡선의 논들, 그리고 셀에 어떻게 그렸을까 신기한 농담(濃淡)이 살아있는 새와 소의 모습 등 동양화의 풍취를 가득 담고 있다.

중국 전통음악을 배경음악으로 사용해 그림이 주는 시각적인 느낌을 배가시켰다. 작품의 초반부에 소가 강물을 건너는 장면은 테웨이 감독의 연출 센스를 엿볼 수 있는 이 작품이 하이라이트다.

▼꿈도 절망도 없는 미래사회의 백일몽▼
<이온 플럭스(Aeon Flux)>(120분. CIC)

96년에 발표된 작품.
러닝타임은 120분이지만 장편이 아니라 7편의 단편을 모았다. 연도와 국가가 불분명한 미래 사회의 여자 테러리스트 이온 플럭스를 주인공으로 하는 SF 애니메이션이다.

감독과 캐릭터 디자인을 맡은 피터 정은 한국 출신이어서 작품외적인 관심을 갖게 한다. 피터 정은 월트 디즈니가 세운 '캘리포니아 아트 스쿨'에서 애니메이션을 공부한 후 나이키의 애니메이션 CF를 제작해 유명해졌다.

<이온 플럭스>는 미국 음악전문 케이블 채널 MTV의 애니메이션 프로그램 '리퀴드 텔리비전'에서 소개된 시리즈이다.

독특한 메카닉 디자인과 자유분방하게 공중을 움직이는 카메라 워킹, 신체의 근육과 굴곡을 과장되게 묘사한 캐릭터는 잘 정제된 디즈니의 애니메이션이나 미소녀류의 일본 애니메이션과는 또다른 느낌을 준다.

주인공이 이온 플럭스이긴 하지만 작품에 따라 일찍 죽기도 하는 등 이야기의 흐름도 기존 애니메이션과는 다르다. 도대체 왜 저렇게 바쁘게 움직이는지 사건의 전후도 모호하고 인과 관계도 뚜렷하지 않은 것이 특징.

하지만 따로따로 노는 것 같은 사건들이 나중에는 묘하게 서로 얽히고 있다. 주인공을 비롯해 등장하는 여자들이 대부분 과도한 노출과 노골적인 섹스어필을 보여주지만, 작품 전체적으로는 낭만적인 분위기나 끈끈한 에로티시즘보다는 건조하고 무료한 권태가 흐르고 있다.

미래의 희망과 꿈도 없고, 그렇다고 절망도 없는 마치 무기질 같은 세계가 백일몽처럼 펼쳐진다. 이래저래 '왜 이럴까' 고민하면서 보면 골치가 더 아픈 작품. 차라리 현란하게 움직이는 구도와 역동적인 주인공의 움직임, 기발한 아이디어의 메카닉 디자인을 감상하는 것이 오히려 편하다. 특히 우리말 자막에 너무 큰 기대를 하지 말 것. 오히려 더 헷갈린다.

김재범 <동아닷컴 기자> oldfield@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