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이장춘/정보기관의 오욕과 곤욕

  • 입력 2001년 1월 9일 18시 35분


필자는 3년 전 김대중 정권의 출범을 앞두고 한 일간지에 기고한 글에서 “우리도 영국 이스라엘 등의 비밀정보기관을 근사하게 닮아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제언한 바 있다. 냉전의 종식으로 정보의 신화가 사라지고 국내정치의 민주화로 독재의 도구를 청산해야 할 때인 만큼 정보기관의 몸집을 적정 수준으로 정상화하고 전문화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정보 공금' 횡령 원천봉쇄해야▼

김대중 정부는 김영삼 정부가 선거 명목으로 유용한 막대한 ‘비밀자금’의 불법지출을 처벌할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야당은 소위 DJ 비자금도 밝히라면서 정치보복이라고 맞서고 있다. 야당측은 과거 대통령 비서관이었던 김중권 민주당 대표가 당시 야당총재였던 김대중대통령에게 전달한 ‘20억원+α’도 그런 돈일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주장한다. 왜 이런 분란이 일어나고 있는가? 일반 국민이 알아서는 안 되는 일로 대통령이 원하면 언제든지 영수증도 없이 쓸 수 있는 수천억원의 돈을 우리 정보기관이 주무르고 있기 때문이다.

도대체 비밀자금의 합법지출과 불법지출에 대한 제3자적 심판은 가능한 것인가? 그 돈은 그런 심판에서 면제하기로 하고, 또 지하에서만 쓰기로 하고 책정해준 민감한 국사비(國事費)다. 그런 돈의 액수와 그 집행의 적정성 여부는 결국 나라의 국가자격(Statehood)과 도덕적 수준의 문제로 귀착된다. 정상적인 나라는 당연히 그런 돈을 정치적 목적으로 사용하지 못하게 한다. 독재와 분단의 유산인 우리의 국사비는 터무니없이 많고 소위 ‘통치자금’이라는 시대착오적인 갑옷을 아직도 입고 있다. 집권하면 한결같이 내놓기 싫어하는 권력의 떡고물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돈을 한푼도 안받는다’고 했다. 말만 떨어지기를 대령하고 있던 정보공금이 있었기 때문이다. 김대중 대통령도 그런 돈을 갖고 있다. 따라서 돈을 받을 필요가 없다. 다만, 김대통령은 ‘돈을 받는다 안받는다’는 소리를 하지 않고 있다. 그가 정보공금을 어디에 어떻게 쓰는지는 비밀이다. 그러니까 김대통령이 김 전 대통령보다 그 돈을 더 합당하게 지출하고 있다고 우길 바도 못된다. 이대로 가면 다음 정부에서 정보공금 문제가 다시 불거질 가능성이 있다. 이래저래 우리 정보기관은 오욕에서 벗어날 겨를이 없다.

정보기관의 생명은 비밀이다. 뭘 하는지 알 수 없게 돼있어야 한다. 노출되면 정보기관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 정보기관은 뭘 하는지가 심심하면 알려지고 충격을 준 것이 한 두 번이 아니다. 박정희 대통령 시해는 충격의 극치였다. 김대중 납치사건을 포함해 국내외에서 벌린 공작 스캔들은 거의 모두 국내정치에 연루된 것이었다. 우리 정보기관이 정보라는 가명을 쓴 ‘정치기관’이라는 것을 확실히 해왔다. 중앙정보부에서 국가안전기획부로, 다시 국가정보원으로 이름만 바꾼다고 달라질 수는 없다. 권력의 시녀로 남아 있는 이상 계속 곤욕을 치러야 할 운명이다.

김대통령이 국가조직의 구조조정 대상으로 정보기관을 첫번째에 포함시키지 못한 것은 결국 그의 한계로 봐야 한다. 거대한 몸체로 엄청난 자금을 거머쥐고 호화호텔급 청사에서 생활하면서 노출되는 것을 꺼리지 않는 스파이조직은 제대로 된 나라에는 없다. 정보기관장은 행정 부처에 부속된 외청의 국장급이 보통이다. 독립적으로 떼어내 거대한 조직으로 유지하는 나라는 미국뿐이다. 그러나 미국의 정보기관장은 정권이 바뀌어도 교체되지 않을 정도로 정치와는 무관하다. 김대통령이 임명한 정보기관장만 세번째다. 비밀기관이기를 포기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긍지갖고 일할 환경 조성을▼

정보기관의 본업은 기본적으로 훔쳐내는 일이다. 거기에다 우리는 간첩을 잡아내야 하는 일까지 겹쳐 있다. 즐겁고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일을 그만 두었다면 존재 이유가 없어진다.

국가를 유지하는 이상 보호해야 할 지하의 필수기관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오욕과 곤욕을 더 겪지 않도록 해방시켜줘야 한다. 그들이 프로페셔널리즘을 긍지로 삼고 보람을 느끼도록 해주는 일은 다음 정부에서나 기대해야 하는가.

이장춘(전 외교통상부 대사·경희대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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