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석의 테마무비]눈의 철학,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 입력 2000년 12월 1일 11시 59분


중학교 때 과학 시간이었던가. 엄청난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인간의 눈이 볼 수 있는 색의 파동과 그 한계성 그리고 그 불완전성! 동물보다도 못한 인간의 시각 능력은 어렸을 때부터 '시각 중심적 사고'에 길들여져 온 필자에게 기습적인 '린치'와도 같았다. 나는 '눈 뜬 장님'이나 마찬가지였다.

인간이 발명한 예술품 중 가장 시각적인 매체인 '영화'는 그 자체로도 충분히 '눈'에 기대고 있지만(영화이론의 대부분은 그 시선과 시점에 대한 것이다) 내용적으로 '본다는 것'을 고찰해보면 더 여러 갈래로 나눠진다.

영화는 ①관객은 보는 데 등장인물들은 관객을 못 보는 것(관음증) ②관객은 못 보는데 등장인물들은 보는(아는) 것(미스터리) ③관객과 일부 등장인물은 보는데 유독 한 명의 등장인물만 못 보는 것(코미디) 등 수많은 상황을 제시하며 관객들을 '게임' 안으로 끌어들인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투명인간'의 모티프다. 할리우드의 B급 SF영화에서 조잡한 특수효과를 통해 만들어낸 투명인간이 내던지는 화두는 코믹 에로영화(목욕탕 침입!)나 첩보영화(투명인간이 된 5분 안에 임무 완수!)에서 활용되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SF의 주종목이다. 최근 <할로우맨>의 케빈 베이컨이 못 볼 걸 보게 되면서 서서히 미쳐가는 모습을 보여줬다면, 존 카펜터의 <투명인간의 사랑>은 훨씬 더 사랑스럽다.

주인공 닉은 '자기 현상'을 연구하는 연구소(마그나스코픽) 폭발 사건 와중에 자기도 모르게 투명인간이 된다. 그를 무기로 이용하려는 CIA가 개입하면서 쫓기는 처지가 되지만, 여기 다큐멘터리스트 앨리스가 용감히도 '투명인간의 연인'이 된다. <투명인간의 사랑>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투명함'에 대한 수많은 해프닝을 로맨스에 적절히 결합시켰다면, 존 카펜터의 영화 <화성인 지구 침공>은 좀더 기괴하다.

어느 떠돌이 노동자는 이상한 종교집단을 접한다. 그곳에서 얻은 선글라스 하나. 그것을 쓰자마자 그는 세상의 '진실'을 보게 된다. 지구는 화성인들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으며, 그들은 해골처럼 기괴한 모습으로 우리 주위를 떠돌고 있었다. 방송국 송신탑을 부수자 화성인 보호막이 부서지고 그들은 처참히 죽어가는데, 카펜터 감독의 메시지는 이런 것이다.

"매스미디어의 보이지 않는 세뇌작용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

투명인간과 함께 각광받는 시각적 소재가 바로 '투시력'이다. B급 영화의 대부 로저 코먼의 'X-레이 맨'은 그 대표적인 영화. 코먼 감독은 충분히 선정적일 수 있는 소재(옷 속의 나체를 볼 수 있다!)를 매우 심각한 차원으로 끌어올려 시각의 괴로움을 말한다. 제임스 박사는 연구에 연구를 거듭, '투시력 안약'을 개발한다. 개발의 목적은 인체의 내부를 투시해 병을 치료하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그는 딜레마에 빠진다. 심층을 보지만 표면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결국 서커스의 광대가 되어 버린 그는 괴물처럼 빨간 눈의 소유자가 되어 스스로 눈을 찌른다. 마치 아무 것도 보지 못했다며 절규하는 오이디푸스처럼.

'볼 수 있음/없음'의 테마는 멜로드라마에서도 100% 활용된다. 죽은 후에도 사랑하는 연인 곁을 맴도는 애절한 사연의 영화들. <사랑과 영혼>은 가장 대표적인 영화다. 이 영화는 인간의 감각계에서 추방된 패트릭 스웨이지가 그 세계로 다시 진입하기 위해 벌이는 안간힘을 보여준다. 그는 깡통을 발로 차거나 동전을 들어올리려 하고, 영매의 몸을 빌려 다시 한 번 그녀의 감촉을 느끼려고 한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느끼게 하는, 그리고 결국 믿게 만드는 것. 그것은 <영혼은 그대 곁에>에서 스필버그가 보여주었던 '사랑'의 힘과도 일맥상통한다. 비행기 사고로 죽은 남자는, 그녀를 '너무나 사랑했기에' 그녀 곁에 머문다. 하지만 그녀에게 접근하는 남자가 있었고 사랑했던 아내는 싫지 않은 기색이다. 이때 천사로 등장하는 오드리 헵번은 "그녀를 진정으로 위한다면 '사랑의 수호천사'로 만족해야 한다"고 말한다. 오히려 그것이 이승에서의 사랑보다 더 위대하다는 것도….

<플레전트빌>의 존재는 독특하다. 이 영화의 무대는 50년대 시트콤의 배경인 '흑백 마을' 플레전트빌. 이 세계에 투입된 쌍둥이 남매는 마치 프로메테우스처럼 그곳에 '불'의 선명함과 '섹스'의 쾌락과 '예술'의 화려함을 알려준다. 그리고 이 영화는 그 모든 것을 '색깔'로 표현하며, 무채색의 세계는 새로운 감수성을 받아들일 때마다 마치 단풍잎처럼 물들어간다. 보는 것이 믿는 것? 최소한 <플레전트빌>에서만큼은 '믿는 것이 보는 것'이다.

하지만 '시각 게임'의 대가는 역시 M. 나이트 샤말란이다. 샤말란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집요할 정도로 빠져드는데, 작년에 개봉된 <식스 센스>와 신작 <언브레이커블>은 보이지 않는 존재의 거대함을 말한다. 특히 <식스 센스>는 영화사상 유례없이 러닝타임 내내 관객을 속여 버린 '희대의 사기극'이다. 브루스 윌리스가 보는 것이 모두 '죽은 자'의 시각이었다니...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본 것일까? 영화 속에서 '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은 한끝 차이다.

김형석(영화칼럼리스트)woodym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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