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정훈의 책 사람 세상]체링크로스街 헌책방의 낭만

  • 입력 2000년 10월 6일 18시 37분


앤서니 홉킨스와 앤 밴크로포드 주연의 영화 ‘체링크로스가 84번지’(84 Charing Cross Road)의 동명 원작 주인공인 프랭크 도엘. 그는 실존 인물로, 런던의 헌책방 Mark & Co.의 구매책임자였다.

체링크로스가 84번지는 서점의 주소인데, 현재는 동명의 도서 및 영화의 무대가 되었던 곳임을 표시하는 현판만 걸려 있다.

◇ 도엘과 헬렌 한프의 편지

원작은 1949년부터 20년 동안 도엘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사랑과 우정의 중간쯤에 해당하는 친밀한 교분을 쌓은 여성 헬렌 한프(1916∼1997)가 1970년에 출간한 바로 그 편지이다.

뉴욕의 가난한 작가 헬렌 한프 여사가 구하기 힘든 중고도서에 대해 문의하는 편지를 보낸 것이 우정의 시작이었다. 도엘의 갑작스런 죽음(1969)으로 중단된 편지는 책과 문학에 대한 애정을 공유하는 두 사람 사이의 오랜 우정의 기록이자, 당시 런던과 뉴욕의 생활상의 기록이기도 하다. 물론 두 사람은 생전에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때문에 e메일을 통해 사랑을 키우던 영국의 연인들이 그곳을 처음 만나는 장소로 선택하기도 한다.

보통 헌책방으로 부르는 중고도서 전문서점에서는 숨겨진 보물을 찾는 듯한 설렘을 느낄 수 있다. 본래 소유자가 여백에 적어 놓은 글귀를 통해 모르는 사람의 속내를 슬쩍 훔쳐보는 불온한(?) 즐거움도 만만치 않다.

이쯤 되면 ‘헌책방의 낭만에 대하여’ 같은 노래도 가능할 것 같지만, 낭만이 헌책방의 전부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헌책방이 추억과 낭만의 장소로만 남지 않고 실질적으로 도서 유통의 중요한 축이 될 때, 추억과 낭만도 계속 이어질 수 있다.

◇ 인간의 숨결이 느껴지는 곳

최근에는 인터넷이 헌책방의 새로운 활로로 부각되고 있다. 실제로 외국의 경우, 헌책방들이 방대한 온라인 네트워크를 구축하여 대형 서점을 능가하는 도서 데이터베이스(http://www.bookfinder.com)를 갖추기도 한다.

물론 그런 경우에도 일반 온라인 대형서점과는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구체적인 주문 처리과정은 어디까지나 개별 서점 주인과 고객 사이의 e메일 의사 교환을 통해 이루어진다.

개인적인 경험이지만 주인의 성격에 따라, 말만 잘하면 공짜라는 흥겨운 분위기로 응대하는 곳이 있는가 하면, 사무적인 태도로 응대하는 곳도 있다. 백화점보다는 재래시장에 가까운 셈이다. 결국 디지털 시대 헌책방의 과제는, 새로운 매체를 통해 서비스와 업무 효율을 극대화하면서도 동시에 어떤 인간적인 것을 보전하는 일이다.

이른바 인터렉티브라 불리는 인터넷의 특성은 새로운 형태의 낭만과 추억을 낳는데 오히려 유용하다.

e메일을 통해 교분을 쌓은 새로운 시대의 프랭크 도엘과 헬렌 한프를 기대해 본다.

(출판칼럼니스트)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