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사람세상]안철수연구소 안철수 사장

  • 입력 2000년 8월 29일 18시 56분


<<‘바둑은 내 평생의 벗이다.’ 바둑 애호가 가운데 바둑에서 인생과 세상을 사는 법을 배웠다는 사람이 많다. ‘바둑은 인생의 축소판’이란 말처럼 사람 사는 법도 기리(棋理)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 유명인사의 바둑에 얽힌 얘기를 소개하는 ‘바둑·사람·세상’을 싣는다. >>

컴퓨터 바이러스 백신 프로그래머에서 최근 인터넷 보안업체(안철수연구소)의 경영자로 변신하면서 공격적 경영을 선언한 안철수(安哲秀·38)사장.

바둑이 아마추어 단(段) 수준인 그에게 ‘바둑과 경영’이라는 주제로 인터뷰를 요청했을 때 과연 응할지 내심 걱정했다. 그러나 그는 “다른 인터뷰라면 몰라도 ‘바둑과 경영’이라면 할 말이 많다”며 흔쾌히 인터뷰에 응했다.

인터뷰 당일 그는 미리 준비해온 바둑경영론을 ‘첫번째, 두번째…’ 순서를 매겨가며 막힘없이 이야기했다.

◇이론에서 실전으로

그의 바둑 배우기는 일반 사람들처럼 실전→이론이 아니라 거꾸로 이론→실전이었다.

서울대 의대 예과 2년 시절 바둑을 취미로 삼기로 ‘결심’했다. 그는 바둑책부터 사들였다. 처음 손에 잡은 것이 일본의 오다케 히데오(大竹英雄) 9단이 쓴 바둑 입문서. 이어 바둑잡지 포석 정석 끝내기 사활책 등 시중 서점과 헌책방에서 구할 수 있는 책은 모조리 사들였다. 이후 약 50여권이 되는 책을 모두 외워버렸다.

어느정도 자신감이 붙자 기원에 나갔다. 처음엔 10급에게 9점을 놓고 100집이상을 졌다. 실전감각이 전혀 없던 탓. 그러나 책에서 다져온 내공이 발휘되며 기력이 급상승했고 1년만에 2급까지 올라갔다. 부산 한국기원 서면지부에서 기원을 운영하던 이기섭(李基燮) 6단이 그에게 언제 바둑을 배웠는지 물어보더니 “아깝다. 어렸을 때 배웠으면 조훈현 못지않은 기재인데…” 라며 안타까워 했다고 한다.

◇바둑 경영론

그가 기자에게 털어놓은 ‘바둑 경영론’의 요체는 3가지.

▽부분적 이득보다 전체를 봐라〓바둑도 그렇지만 인생이나 사업도 장기적인 승부. 바둑에 사석(捨石)작전이 있듯이 단기적으론 손해인 듯 싶어도 장기적이고 넓은 흐름을 놓쳐서는 안된다.

예를 들어 코스닥 등록도 마찬가지. 사업 규모와 수준에 따라 적절하게 돈을 끌어들여야지 돈을 많으면 좋다고 무조건 등록하고 보자는 식이 돼서는 곤란하다. 돈이 쓸데없이 많아지면 사업의 긴장도가 떨어지고 자금의 효율적 집행이 안된다. 장기적 사업전망 아래 왜, 언제 돈이 필요한지 파악해야 한다.

▽큰 곳보다 요소를 차지해라〓한판의 바둑을 둘 때 놓쳐서는 안되는 요소가 반드시 있다. 인터넷 보안사업 분야도 여러 갈래가 있다. 결국 어떤 것부터 시작할 것인지 선택을 해야 한다.

상대방이 먼저 뛰어들면 가장 타격이 큰 곳은 반드시 선점해야 한다. 모양의 급소를 차지하고 있으면 다음 행마가 편해지는 것과 마찬가지다. 보안사업의 핵심 기술, 즉 요소는 바이러스 백신과 암호화 기술이다. 안철수 연구소는 두가지 기술에 중점을 둘 것이다.

▽정석을 외운 뒤 잊어버려라〓정석을 외우는 것은 지겹고 힘들지만 이를 익혀놓으면 바둑실력이 빨리 는다.

벤처기업의 마케팅에 적용되는 ‘케즘이론’이 있다. 이 이론은 벤처기업 제품이 초기에 판매된 뒤 한동안 수요자가 없는 현상등을 가리킨다.

미국 실리콘 밸리에서는 다 아는 이론이지만 서울벤처밸리에서 이를 아는 사람은 드물다. 한국 벤처기업가들은 흔히 “미국 마케팅 기법이 한국적 상황에서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론도 모르고 한국적 특성만 강조하는 것은 마치 정석도 모르고 바둑을 두는 것과 같다. 이론적 기초를 튼튼히 한 뒤 한국적 상황에 맞게 새롭게 창조하는 것이 올바른 길이다. 바둑 정석을 외운 뒤 잊어버리라고 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바둑을 두지 않는 이유

안사장 사무실에는 아직도 대학시절 기숙사 바둑대회 우승상품으로 받은 바둑판과 알이 소중히 보관돼 있다.

그러나 컴퓨터 바이러스 백신을 개발한 이후 그는 바둑돌을 손에 잡지 않았다.

“제가 장고파거든요. 저는 뚝딱뚝딱 바둑이 싫어요. 한번 잡으면 최소 1시간 이상 걸리는데 그런 시간을 낼 정신적 여유가 없어요.”

본업에 방해되는 것은 좋아하더라도 딱 끊는 철두철미한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서정보기자>suhcho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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