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김형국/元老는 아름답다

  • 입력 2000년 7월 16일 23시 17분


작년에 우리말로도 번역된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저서 ‘늙음의 미덕’은 아름다운 책이다. 익히 알고 있듯이 카터는 재선에 실패할 정도로 재임 당시에는 평가를 받지 못했다. 이 책은 재선에 실패하고 50대 중반에 낙향하는 카터의 참담한 심경, 다시 마음을 다잡고 소외되거나 분쟁이 있는 세계 곳곳을 뛰어다니며 인류애 발휘와 도덕성 회복을 호소해서 많은 사람을 동지로 만드는 성과를 거둔 끝에 퇴임 후에 더욱 빛나는 전직 대통령, 늙어가면서 더욱 위대해진 한 인간의 모습이 진솔하게 적혀 있다. 생물학적 노쇠는 어쩔 수 없지만 한편으로 늙음으로써 지혜가 원숙해짐을 웅변해 주고 있다.

남의 사정은 이처럼 부러운데 우린 ‘원로 부재론’이 정설이다. 전직 대통령을 포함해서 정치판만 쳐다보면 아무도 이를 부정하지 못한다. 일반사회는 어떤가. 정치판을 닮아서인지 노추, 노욕이 다반사다. 분수와 부끄러움을 알기를 다른 곳보다 더 체질화해야 마땅하다는 대학사회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를테면 회갑이나 정년을 맞았다고 당사자가 앞장서서 후학들을 끌어 모아 기념논문집을 '자가발전'하는 일이 예사다.

▼대학사회도 '원로부재론'▼

기념논문집이 모두 쓸모 없다는 말은 아니다. 최근엔 사회봉사라는 항목도 추가됐지만 대학교수의 본분은 역시 교육과 연구다. 둘을 겸비하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교수에 따라 교육에 능했던 분도 있고 연구에 능했던 분도 있다. 전자 같으면 인덕을 기리는 후학들의 회고 수상집이, 후자 같으면 학덕을 기리는 논문집이 마땅할 것이다. 그런데 대학에 몸담았다고 해도 주변에서 수긍할 만큼 인덕이나 학덕을 쌓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오히려 인덕과 학덕이 두루 출중했던 분은 기념 책자를 삼가고 있다. 내년이면 희수인 J선생이 그런 경우다. 선생은 우리 교육학의 개척자였고 관련 사회과학 진흥에도 공헌이 지대했다. 나는 교육학 전공은 아니지만 진작 선생의 학덕을 흠모해서 평소 선생의 고담준론을 즐겨 들었다.

처신도 자기 자신에 대해 엄격 그 자체였다. 내가 사회과학 관련 책을 여러 권 편집한 적이 있는데 한 번도 청한 원고의 제출 기일을 어기는 법이 없었다. 마감일을 맞춘다고 그랬지 싶은데 받침을 마구 빠뜨린 채 속필로 적은 원고를 보내오곤 했다.

언젠가 교육계 인사들과 어울린 자리에서 J선생의 회갑이 멀지 않았음을 눈치챘다. 인덕을 기리는 책자를 낸다면 나에게도 지면을 달라고 청하자 정색을 하며 “앞으로 나잇값을 하고자 후배들을 위해 직접 책을 쓰겠다, 그러니 다시는 회갑 이야기는 꺼내지 말라”고 말문을 막았다. 그 때 그 말을 참 선비상(像)대로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겠다는 자기 다짐 정도로 알아들었다. 국립대 총장에 이어 다시 사립대 총장을 맡았으니 역시 책 쓴다는 말은 허사(虛辭)가 틀림없다 싶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교수들의 퇴직 나이인 60대 중반에 고도성장의 우리 현대사회를 비판적으로 성찰한 뒤 대안을 제시하는 ‘미래의 선택’을 출간했다. 몇 년 뒤에는 사회의 주인인 시민이 보람 있게 사는 삶은 어떤 것인지를 밝히는 ‘인간의 자아실현’을 출판했다. 이어서 최근 나온 ‘한국의 교육세력’을 건네준다. 교육학자답게 개인의 행복과 사회 번영의 약속은 교육의 몫인데, 그 교육은 가정과 학교만이 아니라 언론과 각계 지도자가 함께 책임지는 노릇임을 확인하는 내용이다. 10년 만에 완성한 3부작은 독창적 식견과 논리로 일관하고 있어 세상 어디 내놓아도 당당한 저작들이다.

▼평생 지혜 엮어준 J선생▼

혹자는 비판할 것이다. 공교육이 만신창이가 된 마당에 교육학계 원로가 책임이 많지 않으냐고. 이런 질책처럼 각급 학교 교사들이 심심찮게 돈봉투나 챙기는 등 도덕적 해이가 심각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적잖은 허물에도 불구하고 우리사회가 이룩한 성취 역시 교육의 공덕임도 부정하지 못한다. 세계 현대사에서 한 세대라는 짧은 기간에 근대화의 양대축인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일궈낸 나라로 우리가 유일할진대, 그건 바로 교육에 절대적으로 힘입은 바다. 마침내 노경에 이르러 평생의 지혜를 엮어준 맑은 노익장을 만나고, 더 이상 나는 우리 사회의 ‘원로 부재론’을 수긍하지 않기로 했다.

김형국(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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