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이원기/부실 감추다 투자자 쫓는다

  • 입력 2000년 6월 19일 19시 11분


채권시장이 마비 상태다. 금융권 전체의 유동성은 풍부한 상태고 금리도 안정돼 있지만 모든 경제 주체들이 자금을 초단기로 운용하고 있고 위험 자산에 대한 기피심리가 팽배해 국고채와 극소수 우량기업의 회사채나 CP 등을 제외하고는 거래가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다. 회사채 발행 기업에 대한 불안심리와 자산운용기관에 대한 불신이 상승작용을 일으키는데다가 채권시가평가제의 파급효과를 지켜보기 위해 모두 관망세를 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외환위기 전후에 발행된 회사채의 만기가 하반기와 내년에 걸쳐서 본격 도래한다. 6월 이후 연말까지 33조원이 넘는 회사채가 만기가 되는데 이는 전년 같은 기간보다 50% 증가한 금액이다. 내년에는 62조원이 만기가 돼 올해 대비 30%, 99년 대비 71% 증가하게 된다.

반면에 채권시장의 양대 축인 투신과 은행 신탁계정의 자금이탈이 지속되면서 채권 수요에 공백이 생겨 수급 불균형이 심화하고 있다. 유출된 자금은 주로 은행 고유계정으로 유입되고 있으나 2차 구조조정을 앞두고 국제결제은행(BIS) 기준 자기자본비율에 신경을 쓰는 은행들은 기업에 대한 대출을 꺼리고 있다.

국고채 및 초우량 기업 회사채로만 돈이 몰리면서 실제로 자금조달이 필요하거나 차환을 해야 하는 중견기업들이 자금난에 몰리는 심각한 신용위기를 겪고 있다. 시장에서 기피되는 기업은 시장의 과잉반응에 섭섭해 하기에 앞서 불신의 원인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봐야 한다. 왜 성숙산업이나 투자가 끝난 장치산업들이 아직도 영업 현금 흐름으로 부채를 갚아 나가지 못하고 차환 발행이나 대출에 의지해야 하는지 시장은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차입에 의존하지 않고는 현금 흐름을 맞출 수 없는 기업을 투자자들이 기피하는 심리가 생기는 것을 나무랄 수는 없다. 시장의 실패를 탓하기에 앞서 기업 스스로 투자자들이 돈을 빌려주고 싶어하는 회사로 변신하는 노력을 얼마나 했는지 자문해야 한다. 이것은 다시 구조조정의 문제로 귀결된다.

비단 방만한 경영 때문이 아니더라도 산업 구조의 변화와 라이프 사이클에 따라 사양화되고 도태되는 기업은 불가피하게 속출하기 마련이다. 정부의 임무는 이런 한계기업을 살리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고 신속한 퇴출 절차와 규칙을 확립해 주는 것이다.

한계기업의 정리와 퇴출이 지연되면 시장은 불안에 휩싸이기 마련이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현상을 우려하는 것이다. 한계기업과 금융기관을 살리려는 정책에서 비롯된 게임의 법칙의 혼란이 전반적인 투자활동의 위축을 초래하고 시장의 리스크 프리미엄 상승을 초래해 불필요한 신용경색을 겪는 것이 현실이다.

채권시장으로 자금을 유도하기 위해 투신사와 은행신탁에 여러 가지 신상품이나 채권 전문 펀드 등을 허용한 정부 정책이 효과를 보려면 근본적인 원인인 자산운용기관들에 대한 불신을 제거하는 작업을 병행해야 한다. 이는 결국 투명성이라는 과제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장에서 소화되지 않는 채권을 받아주기 위한 신상품이라면 투자자들의 호응을 받기는 어려울 것이다. 금융기관에 대한 정부의 영향력으로 가입을 권유하는 펀드라면 조삼모사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제 부실을 숨기고, 축소하고, 쪼개고, 넘기고, 미루고 할 필요도 없고 실익도 없다. 시장은 더 이상 충격받지 않는다. 이미 발생한 부실의 정확한 규모를 빨리 확정짓고 누가 얼마만큼 손실을 부담할 것인가를 결정짓는 것이 불확실성 제거의 요체다.

투자자들은 암묵적으로 자기의 위험 선호도에 따라 위험 대비 수익률을 예상해 합리적으로 행동한다. 시장을 둘러싼 불확실성이 너무 커서 투자 위험을 계산하지 못할 때는 당연히 투자를 중단할 수밖에 없다. 불확실성을 빨리 제거해 주는 것이 궁극적으로 시장을 살리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을 확신한다. 20일로 예정된 펀드 부실의 전면적 공개가 투신의 투명성과 신뢰 회복의 출발점이 돼야 한다.

이원기(리젠트자산운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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