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현의 우리문화 우리건축]미술관

  • 입력 1999년 10월 17일 18시 49분


경찰서장은 위대했다. 미술가보다 위대했다. 예술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찾아 평생을 바친 미학자보다도 더 위대했다. 80년대의 경찰서장들은 이런 건 미술작품이 아니라 불온한 선전 포스터라면서 미술관에서 그림들을 거두어 갔다.

장관도 위대했다. 건축가보다 위대했다. 이 미술관에는 팔각정이 올라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상공모를 거쳐 당선된 국립현대미술관 설계를 장관은 그렇게 고치라고 요구했다. 수십 년간 쌓아올린 전문가의 안목은 그렇게 간단히 일축되던 시기였다.

이번 건축가는 좀 달랐다. 미국에서 활동하던 건축가는 고려해 보겠다고 하면서 돌아갔다. 대통령에게 브리핑할 날짜가 다가왔다. 그러나 건축가의 도면에 아직 팔각정은 등장하지 않고 있었다. 장관이라도 대통령이 기다리는 일정까지 늦추지는 못했다. 무엄하게 건축가가 건물설계 내용을 대통령에게 직접 설명했다. 대통령은 지나가듯 한마디했다. 잘된 것 같다고. 이후 새로운 원칙이 세워졌다. 이 건물은 건축가의 설계 그대로 짓는다는 원칙이었다.

그렇게 건물은 완성되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건축은 공간을 다루는 예술”이라고 막연히 이야기하던 사람들에게, 공간을 이렇게 다루면 건축도 예술이 된다고 알려주는 건물이 되었다. 그 안에 수장된 어느 그림이나 조각에 결코 뒤지지 않는 훌륭한 작품이 된 것이다.

그러나 완공된 후 건물은 학대받기 시작했다. 다시 대통령이 등장했다. 이번에는 삽을 들고 등장했다. 대통령 기념식수. 건축가는 나무 한 그루 심는데도 소홀하지 않았다. 모든 나무들이 가지런히 줄을 서 있어야 이 건물에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기념식수 하는데 그런 세심함을 헤아릴 이들은 없었다. 모두 낙엽을 떨구는 가을에도 혼자 시퍼런 서슬을 과시하는 나무가 미술관 입구에 자리잡았다. 그러나 대통령이 한적한 산사에서 오욕의 길을 걸을 때 대통령기념식수라고 새긴 동판은 슬그머니 사라졌다. 독야청청하던 나무는 이제 성긴 가지 몇을 간신히 붙든 채 버려진 듯 초췌하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소란스런 미술관일 것이다. 동물원에서 놀다 지친 유치원생들이 몰려와 놀이터로 사용한다. 방학숙제를 하러 온 초등학생들이 하기 싫은 감상 숙제는 일찌감치 베껴놓고 여기저기 뛰어다니면서 그림과 조각을 만진다. 미술품 감상 숙제를 던져주고 미술관에 어린이들을 풀어놓은 것으로 미술 교육이 끝난다고 생각하는 만큼 문화의 세기는 멀리 있다.

미술과 건축의 관계는 바뀌고 있다. 미술관에 맞춰 작품이 전시되는 것이 아니고 작가에 맞춰 건물이 지어지기 시작했다. 서울 종로구 부암동 산기슭에 자리잡은 환기미술관은 그런 미술관이다.

작품에 맞춘 건물도 세워졌다.서울 태평로 한가운데 자리잡은 로댕갤러리는 ‘칼레의 시민’과 ‘지옥의 문’, 단 두 개의 작품을 담는 그릇이다. 거친 벌판에서 비바람 맞아 청동녹이 죽죽 흘러내린 모습이어야 더 박력 있을 조각들. 그러나 이들을 거리에 내놓기에 우리의 도시는 거칠어도 너무 거칠다. 이 미술관은 그렇게 탄생했다.

그러기에 여기서는 조각과 함께 거기 맞춰 지은 건물도 함께 보아야 한다. 로댕갤러리의 건축가는 제대로 된 그릇을 만들었다. 유리로 된 벽과 천장은 야외처럼 풍부한 빛을 가진 공간을 만든다. 그 벽은 가장 단순한 모습으로 물러난 배경막이다. 조명기구도, 소화전도, 냉난방장치도 눈에 거슬리지 말라고 모두 숨어들었다. 그 세련됨이 오히려 로댕의 텁텁하고 억센 맛과 대비가 될 정도다.

로댕 갤러리는 분명 수작이다. 먼저 박수를 받을 것은 이 금싸라기 땅을 미술관으로 내놓은 기업인의 결단이다. 건축가가 설계한 말없는 구조물에 생명을 불어넣은 것은 운영하는 이, 관람하는 이들이다. 목요일 저녁이면 이 공간에서는 음악회가 열린다. 무언극 무용공연도 있다. 산 속에 내던져진 국립현대미술관과 달리 서울 도심의 가장 번화한 거리에 자리잡은 로댕갤러리는 그렇게 살아 숨쉰다. 아들 딸의 손을 잡은 시민들이 그 미술관의 밤을 밝힌다.

시민들이 미술에 다가서지 않는다면 미술이 시민에게 다가서야 한다. 서울 경복궁 지하철역은 가장 대중적이고 열린 미술관이다. 일정한 규모 이상의 건물에 ‘미술장식품’을 설치하라는 법규는 더 적극적으로 거리를 미술관으로 만들 수 있는 바탕이 된다.

그 다음은 화가와 조각가의 몫이다. 그 열린 미술관에 소나무와 폭포가 등장하는 그림들만 걸려있고 거리에는 모정, 향리, 망향 등의 제목으로 표현되는 조각들만 들어서 있다면 미술문화는 제자리 걸음만 할 뿐이다. 미술의 가치가 아름다움에 있던 시대는 분명 지났다. 비엔날레에서는 붓으로 그린 그림은 오히려 구석으로 밀려났다. 설치미술은 가장 큰 흐름이 되었다. 거칠고 숨가쁜 삶의 모습은 우리시대 미술의 화두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미술가들의 몫이다. 건물도 아닌 그림이 크기 단위로 값이 매겨지고, 건물 앞에 서로 자기 조각을 놓겠다는 이전투구가 벌어지는 한 미술은 아름다울 수 없다.

서현(건축가)hyun1029@chollia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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