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밀레니엄/20세기 우연과 필연]할리우드 건설

  • 입력 1999년 9월 29일 20시 05분


영화는 20세기에 예술로서, 산업으로서 그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열었다. 영상과 음향이 결합한 종합예술장르라는 ‘출생증명서’에 다시 시간성과 공간성의 제약을 동시에 뛰어넘은 가장 매력적인 서사장르라는 지위를 획득했다. 또 영화는 첨단 테크놀러지와 대규모 자본이 결합한 가장 창조적이고 수익성 높은 산업이라는 ‘사회보장번호’까지 발급받았다. 그리고 그 수취인 주소의 대부분은 ‘할리우드’였다.

하지만 할리우드가 ‘꿈의 공장’ 또는 ‘영화산업의 메카’가 된 배경에도 역사의 아이러니가 숨어 있다.

1913년까지 미국영화의 산실은 뉴욕과 시카고였다. 당시 영화제작사와 배급사의 대부분은 동부에 집중돼 있었다. 유럽은 1895년 프랑스의 뤼미에르 형제가 최초의 영화 ‘기차의 도착’을 상영한 이래 조르주 멜리에스의 ‘달나라여행’ 등 보다 창조적이고 기술적으로 앞서 있던 영화의 공급지였고 동부는 이의 수입창구이기도 했다.

반면 미대륙 서부 끝에 위치한 할리우드는 캘리포니아주의 작은 농촌마을에 불과했다. 그런 할리우드가 처음 미국 영화계의 관심을 끌게된 것은 사계절 청명한 천혜의 날씨 때문이었다.

1909년 시카고의 악천후로 ‘몬테 크리스토 백작’의 촬영지를 찾아 헤메던 셀리그영화사가 캘리포니아의 ‘날씨’를 발견했다. 청명한 날씨는 제작기간의 단축은 물론 제작비용까지 엄청나게 줄여주는 혜택을 주었다. 1913년 할리우드에 첫발을 디딘 네스토르 영화사도 대부분 야외촬영에 의존해 1주일동안 무려 3편의 영화를 제작했다.

하지만 동부 영화사들의 서부행 ‘스튜디오 러시’에는 또다른 비밀도 숨겨져 있었다. 발명왕 토머스 에디슨의 감시를 피해 해적영화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에디슨은 미국 영화산업에 빛을 던져준 ‘창조주’였지만 동시에 암흑기를 몰고 온 ‘마왕’이기도했다.

에디슨은 원래 활동사진기를 ‘아이들 놀이기구’로 치부해 조수인 로리 딕슨에게 그 연구의 대부분을 떠맡겼다. 하지만 이 연구의 결실이 맺어져 활동사진이 대중화되고 영화사들이 큰 돈을 벌기 시작하자 자신의 발명특허권을 주장하며 심술을 부리기 시작했다.

에디슨은 1909년 스스로 세운 비타그래프를 포함, 칼렘 루빈 셀리그 바이오그래프 등 당대 대형영화사들을 끌어들여 ‘영화특허권회사’라는 일종의 신디케이트를 결성했다. 그리고 이 신디케이트의 허락없이 영화를 촬영하거나 복사할 수 없다고 선언하고 모든 영화촬영기기 사용에 철저한 로열티를 요구했다.

에디슨은 또 영화상영 시간이 길어지면 관객들이 무료해 한다는 이유로 영화 한편당 상영시간을 20분 이하로 제한했다. 게다가 영화배우들의 인기상승에 따른 출연료 인상을 막기 위해 자막에서 배우들의 이름을 지우도록 강요했다. 당시 독립영화사들이 영화를 제작하려면 에디슨의 포위공격에 항복하든지 아니면 치고 빠지는 게릴라전을 펴는 수 밖에 없었다.

1913년 뉴욕에서 ‘피처 플레이 컴퍼니’라는 영화사를 세운 32세의 유태인 사업가 제시 래스키도 이 게릴라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처남 사무엘 골드윈, 영화감독 세실 비 드밀과 함께 장편영화 제작을 통해 에디슨이 설치한 지뢰밭을 뚫고 가기로 의기투합했다.

당시 영화게릴라들이 특허권회사의 눈을 피해 영화를 찍은 곳은 플로리다주나 캘리포니아주 같은 국경지대였다. 에디슨의 부하들이 추적해오면 영화장비를 챙겨 국경을 넘어 도망가기 손쉬웠기 때문이다.

래스키 일행이 자신들의 첫 장편영화 촬영장소로 점찍은 곳은 원래 애리조나주 플래그스태프였다. 하지만 풍광이 마음에 들지 않아 1914년 할리우드의 한 마구간에 나타났다. 현재 ‘할리우드 스튜디오’로 보존돼 있는 이 마구간에서 이들은 말에게 주는 물로 흔건히 젖은 바닥 때문에 물통에 발을 담근 채 영화를 찍어야했다.

이렇게 찍은 할리우드 최초의 장편영화 ‘스쿠아 맨’은 1만5000달러의 제작비로 22만5000달러의 흥행수입을 올렸다. 덕분에 래스키는 할리우드에 도착한지 18개월후에는 그 마구간이 들어섰던 거리 전체를 자신의 스튜디오로 바꿨다.

이후 래스키는 1916년 자신의 뒤를 따라온 아널드 주커의 ‘페이머스 필름 컴퍼니’와 힘을 합쳐 ‘파라마운트사’의 문을 열었고, 메이저 스튜디오 황금시대의 개척자가 됐다. 그리고 그 열쇠는 바로 에디슨이 그토록 싫어했던 장편영화와 스타시스템이었다.

래스키와 주커 등은 이후 매리 픽포드,글로리아 스완슨, 루돌프 발렌티노 같은 대형스타들을 발굴한 뒤 자신들의 장편영화에 독점출연시키는 방법으로 할리우드를 ‘20세기의 바빌로니아’로 탈바꿈시켰다.

에디슨의 탐욕이 없었다면 어쩌면 할리우드는 20세기에 가장 화려한 지명의 하나가 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아니 적어도 그 시기가 한참 뒤로 미뤄졌을 것이다.

▼파라마운트 제작자 리알즈▼

“30,40년대 할리우드가 누렸던 시절을 황금시대라고 한다면 90년대이후는 플래티넘시대라는 말이 적절할 것입니다.”

할리우드에서 최초의 장편영화를 제작했던 제시 래스키가 아널드 주커와 함께 세웠던 파라마운트 스튜디오는 지금도 할리우드를 지키고 있다. 그 파라마운트 스튜디오에서 71년째 할리우드를 지켜온 영화제작자 에이시 리알즈(81)를 만났다.

리알즈는 1928년 10세의 나이에 파라마운트사 영화관의 매표원으로 출발, 19세부터 지금까지 수백편의 서부영화를 제작한 파라마운트사의 최연장 제작자였다.

그는 과거와 현재의 할리우드를 어떻게 바라볼까.

“예전에는 할리우드의 여성이라고는 여자배우를 빼고는 타이피스트와 비서들이 전부였지만 지금은 제작자 감독 작가들이 즐비합니다. 흑인이나 소수민족도 엄청나게 늘어났지요. 그것은 할리우드가 그만큼 다양하고 창조적으로 변모하고 있다는 반증 아니겠습니까.”

그는 그러면서 영화산업은 21세기에 더욱 번영을 누릴 것이고 할리우드의 신화는 계속될 것으로 확신했다.

“갈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영화관을 찾고 있습니다. 영화는 캐릭터 음반 등 수많은 부가수입을 통해 더많은 부가가치를 창출하고 있습니다. 타이타닉이 벌어들인 총수입은 33억달러에 이릅니다. 그 이전의 어떤 영화도 이처럼 많은 돈을 벌어들이지 못했습니다.”

리알즈는 그 이유를 간단하게 정리했다.

“우리는 꿈을 팝니다.모든 사람들이 꿈을 꾸는 한 영화산업은 계속될 것이고 영화가 존재하는 한 할리우드도 계속 존재할 것입니다. 할리우드는 이제 현실공간의 단계를 지나 모든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하나의 상징공간이 됐기 때문입니다.”

▼할리우드 영화산업 현황▼

할리우드라는 지명의 기원은 1886년 현재의 할리우드가를 중심으로 120에이커의 토지를 구입한 캔자스출신 부동산업자 하비 윌콕스의 부인 다에이다에서 비롯한다.

콩밭이나 오렌지 레몬의 과수작물을 재배하던 작은 농촌마을 할리우드는 당시까지만해도 ‘카후엥가’로 불렸다. 원주민이었던 가브리엘리노 인디언들이 할리우드 주변을 ‘작은 언덕들’이라는 의미의 ‘카후엥냐’로 부른 데에서 유래한 지명이었다.

윌콕스는 1887년 에이커당 150달러에 구입한 이 지역 토지를 분양하기 위한 지도를 만들며 ‘할리우드’라는 지명을 붙였다. 다에이다는 캔자스에서 할리우드로 오는 기찻길에서 만난 한 여성이 알려준 동부 여름휴양지의 이름이 마음에 들어 같은 이름을 땄다고 한다. 이 때문에 할리우드는 호랑가시나무 한 그루 없이도 ‘호랑가시나무숲’이라는 지명을 얻었다. 1900년 500명에 불과했던 할리우드의 인구는 1996년 현재 27만여명까지 늘어났다. 1913년 단 하나뿐이던 영화관은 ‘이집션 시어터’와 ‘차이니스 시어터’‘파라마운트 시어터’등 세계 최초의 개봉 영화관을 포함해 수십여곳으로 확산됐다.

30,40년대 할리우드 전성기를 이끌었던 메이저 스튜디오들 가운데 현재 할리우드에 남아 있는 것은 파라마운트 하나뿐이다. 유니버설은 유니버설시티, 20세기폭스는 베벌리힐스, 워너브러더스와 디즈니는 버뱅크, 콜럼비아는 컬버시티로 빠져나갔다. 제작비와 인건비가 싼 캐나다도 새롭게 각광받고 있다.

하지만 할리우드는 축소된 것이 아니라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미국 버라이어티지의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할리우드의 제작편수는 464편. 한국의 지난해 제작편수 43편의 100배를 넘어선다. 하지만 독립영화사의 작품까지 포함하면 광역 할리우드의 제작편수는 4만여편이 넘어선다. 이런 할리우드의 위력은 중국과 인도를 제외한 전세계 영화시장에서 85%를 차지하고 있는 미국영화의 위상에서도 확인된다.

할리우드는 전세계 영화광들의 순례지이기도 하다. 95년을 기준으로 1년에 할리우드를 찾는 관광객의 수는 920만명, 수입은 10억달러를 넘어섰다.

〈할리우드〓권재현기자〉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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