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밀레니엄/30년代 대공황]이기간 재임 美대통령 2人

  • 입력 1999년 8월 18일 19시 41분


‘밥이 하늘이다’는 말도 있지만 허버트 후버(1874∼1964)와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1882∼1945)처럼 경제상황에 의해 평가가 극단적으로 엇갈린 인물도 드물 것이다. 이는 물론 대공황 때문이었다.

허버트 후버는 고아로 자라 40대에 백만장자가 된 사람이지만 그의 재임시 미국은 부자에서 거지가 되었다. 그가 대통령에 취임한 지 일곱달만에 뉴욕 증시가 붕괴하면서 악몽은 시작되었다.

그는 “미국의 주요산업 기초는 건실하다”며 회복이 임박했다고 거듭 약속했지만 경제는 점점 더 불황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당시 누구나 그랬지만 후버는 해결방법을 찾기가 어려웠고 그의 자유주의적 신념은 정부가 공황 해결을 위해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을 주저하게 만들었다.

루스벨트가 훗날 ‘뉴딜’이라는 이름으로 실시한 공공사업과 감세정책 등 많은 부분은 이미 후버때 시작된 것이었으나 후버는 이들을 일관되게 시행하지 못했다. 1932년 선거에서 그는 경제를 망친 장본인처럼인식되어프랭클린루스벨트에게 대통령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이에 반해 루스벨트는 전통적 자유주의에 반하는 정부의 강력한 경제개입, 케인스이론에 기반한 이른바 ‘수정자본주의’를 도입함으로써 미국 역사상 최초의 4선 대통령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농산물 생산을 규제하는 농업조정안, 기업활동을 조정하는 국가산업회복안 등 그가 입안 실시한 정책들은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을 신봉하던 자본주의 전통에는 ‘혁명’과도 같은 것들이었다. 미 대법원은 그 법들을 위헌으로 선언하기도 했으나 공황으로 고통받던 미 국민은 루스벨트의 정책을 지지했다.

사회복지도입과 공공사업확대 실업자구제책 등 ‘뉴딜정책’ 이후 불황은 다소 완화되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으로 완전히 상쇄되었다. 이때문에 루스벨트의 일거수일투족은 소아마비 장애를 딛고 일어선 그의 개인적 스토리와 함께 고귀한 이념, 훌륭한 치적으로 높이 평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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