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옴부즈맨 칼럼]김정란/문화기사 대중화 추구에 아쉬움

  • 입력 1999년 5월 23일 19시 59분


사람들은 언제나 미래를 알고 싶어 한다. 모든 것이 정신없이 변화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현대인들은 더욱 더 그렇다. 따라서 여러 매체에서 ‘밀레니엄’에 관한 기사를 단골로 싣는 것은 당연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정작 내용은 기대처럼 알차 보이지 않는다. 이유없이 불안을 증폭시키는가 하면, 턱없는 낙관주의가 ‘밀레니엄’의 이름으로 유포되기도 한다.

18일자 ‘밀레니엄 키드’는 무슨 내용을 전달하고자 하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새로운 교육방식’을 따르는 소신있는 부모와 그 교육방법의 혜택을 누리는 자녀의 이야기처럼 느껴지기는 하지만, 그것이 굳이 왜 ‘밀레니엄’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달고 있어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게다가 ‘광주 지역 학부모 성향’은 왜 기사에 토끼꼬리처럼 덧붙여져 있을까? 성의없는 일반화가 불안하게 느껴졌다. 기획 의도의 불투명성으로 인해 ‘밀레니엄 키드’는 ‘밀레니엄’과 별 상관없어 보이는 사소한 가족 이야기를 소개하는 것으로 그치고 만 것처럼 보인다.

21일자 이어령(李御寧) 새천년준비위원장 인터뷰에는 두 명의 기자가 참가했지만 결과는 공소해 보인다. 이어령씨의 화려한 수사에 기자들이 말려든 것 같다는 느낌을 준다. ‘왜’‘어떻게’를 좀더 파고들었어야 하지 않을까. 미래에 대한 비전은 이미지나 볼거리가 아니라 철학으로 제시되는 것 아닐까.

‘밀레니엄’관계 기사 뿐만이 아니라 동아일보의 문화기사 전반에서는 어떤 ‘어정쩡함’이 느껴져서 안타깝다. 이러한 특징은 ‘책 소개’기사에서 두드러지는데 한결같이 읽기 쉬운 실용 서적이나 소프트한 기획물만을 소개하고 있다. 이런 분위기에서 어떻게 본격적인 인문학 서적들이 대중을 찾아갈 수 있겠는가. ‘상당히 난해한’ 인문학 서적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다른 나라의 문화적 상황을 부러워하기 전에 그러한 상황이 만들어질 수 있도록 언론이 먼저 애써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19일자에 프랑스 작가 르클레지오 인터뷰가 실렸다. 르클레지오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은 독자들로서는 분명히 큰 기쁨이다. 그러나 인터뷰 내용은 의아스럽다. 이 정도 얘기를 나누려고 기자가 프랑스까지 찾아갔단 말인가. 오히려 현지에서 공부하고 있는 불문학 전공자에게 인터뷰를 맡기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게다가 무슨 계기로 그를 인터뷰한 것일까? 기사를 읽어 보면 책이 한국에서 출간된 것 같지도 않고, 작가가 현지에서 특별히 새삼스러운 조명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 같지도 않다. 그 날짜라면 오히려 5·18이라는 한국의 비극적인 상황과 연관된 한국 작가를 인터뷰하는 것이 더 적절하지 않았을까?

서울대학생 익사 사건에 즈음해서 기획된 ‘일그러진 대학 문화’(20, 21일자)는 시의적절한 기획이었다. 이 사건은 우리 사회가 지금 얼마나 끔찍한 정신적 공황 상태에 놓여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대학생들은 지금 변할 줄 모르는 아버지들의 억압적이고 보수적인 문화와 철없는 신세대 문화 사이에서 문화적으로 완전히 기아가 되어 있다.

모든 것이 기능주의적인 방식으로만 처리되는 한국사회 풍토에서 젊은이들은 철학을 정립하지 못하고 헤매고 있다. 2회로 끝나버린 것이 아쉽다. 훨씬 더 본격적이고 집중적인 기획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김정란<시인·상지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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