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홍사종/다시 흰 와이셔츠가 그립다

  • 입력 1999년 3월 26일 18시 53분


와이셔츠 한 벌을 사기 위해 백화점에 들렀다가 느낀 생각 한 토막이다. 예전 같으면 와이셔츠의 주종은 흰 와이셔츠다. 그러나 지금은 주종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흰 와이셔츠 대신 형형색색의 컬러 와이셔츠가 손님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 과거 그 자리에서 영화를 누리던 흰 와이셔츠는 언제부터인가 슬그머니 판매대 한 쪽 귀퉁이로 밀려나 버렸다. 순간 퍼뜩 뇌리를 치는 생각이 있었다.

아, 흰 와이셔츠가 상징하는 시대가 이성과 합리주의 시대를 상징한다면 컬러와이셔츠는 창의적 감각과 감성주의 시대를 상징하는구나. 이성과 합리주의 시대는 가고 감각과 감성을 중시하는 시대가 도래했음을 세상 남자들의 와이셔츠가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하긴 요즘 텔레비전을 보면 대통령도 흰 와이셔츠는 튀지 않아서 그런지 잘 안 입는 듯싶다. 어떤 회사 사장이 직원들을 모아놓고 컬러 와이셔츠 입기를 권장하는 내용의 TV 뉴스에까지 나오는 세상이 됐다. 주제는 감성과 감각이 요구되는 시대에 맞는 유연한 사고를 위해 컬러 와이셔츠를 입으라는 것이다.

그 영향인지는 몰라도 아무튼 대한민국 남자들은 와이셔츠를 통해서라도 튀어보려고 야단이다. 평생 흰 와이셔츠만 입고 흰색적 사고로 살아온 세대들도 시대변화에 재빨리 적응하려는 듯 컬러 와이셔츠로 갈아입고 있다.

그야말로 컬러풀한 세상이 됐다. 그러나 그 때 다시 뒤통수를 치며 다가오는 의문점 하나가 떠올랐다.

배 한 쪽에 구멍이 뚫려 물이 들어올 때 이를 피하려고 한 쪽으로만 사람들이 몰려가면 배는 균형을 잃고 전복된다. 세상이 온통 컬러풀한 쪽으로만 달려가기만 한다면?

백화점 판매대 한 쪽 귀퉁이로 밀려난 우리의 가련한 흰 와이셔츠. 흰 색을 거꾸로 보면 컬러의 바탕이 되는 기본색이다. 흰색이 있어야 그에 대비해 모든 색상도 튄다. 나의 엉뚱한 발상을 다소 과장해서 풀어본다면 흰 와이셔츠가 상징하는 가치야말로 이 사회의 가장 기본적이고 본질적인 가치다. 이성과 합리주의라는 본질의 바탕 위에 창의적 감각과 감성의 꽃을 피워야만 사회도 균형 조화 발전한다고 믿는다.

그런데 현실은 컬러풀한 세상의 변화에 맞추어 흰 와이셔츠의 소중한 가치를 냉대하기 일쑤다.

요즈음 새 밀레니엄 시대를 맞이하기 위한 준비가 사회 곳곳에서 요란스럽게 진행되고 있다. 문화계도 예외는 아니어서 2000년의 새로운 문화적 가치 찾기에 분주하다. 문예사조의 흐름도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를 이어 새 천년을 이끌어갈 그 어떤 주의들이 난무할 것이라고 아우성이다.

오늘날 대중문화의 양상 또한 그렇다. 거칠고 메마른 시대를 상징이라도 하듯 댄스뮤직 비트 사이버예술 등 다양한 색채의 변용을 거듭해 나가고 있다. 이같은 상황은 순수예술 분야에서도 비슷하게 되풀이되고 있다. 그야말로 문화 컬러 시대에 살고 있음을 실감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잔잔한 감동과 아름다움이라는 문화의 본질적 가치인 서정주의를 더욱 소중히 하자는 외침은 어디에서도 들리지 않는다. 너도 나도 컬러풀한 문화의 세태를 쫓는 동안 흰 와이셔츠의 운명처럼 우리의 서정주의는 지나간 시대의 퇴물이 되어 판매대 한 귀퉁이를 쓸쓸하게 지키고 있다. 굳이 예를 들자면 어디 문화계뿐이랴.

다시 흰 와이셔츠가 그리운 세상이다.

홍사종(정동극장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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